체리피킹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
유년기.
참 여리고 가냘픈 꼬마애였던 나는 내심 항상 남자아이들의 거친 놀이를 하기보단 여자애들처럼 소소한 취미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근데 아무래도 남자들 틈에서 살아나가야 하니까, 정말 하기 싫지만 남자아이들과 함께 거친 놀이들을 해야만 했지. 그런 게 너무 싫었는데도.
남자여서 원치 않았던 그런 거친 놀이를 진탕 벌이고 나니까 선생님이 잔뜩 뿔이 나서는
"너희 남자애들은 왜 항상 그렇게 거칠게 노는 거야? 저기 얌전하게 자기 활동하는 여학생들한테 방해되잖아! 남자애들은 여자애들한테 사과해! 그리고 복도로 나가서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
… 난 남자라서 내가 하고 싶은 인형놀이 같은 소소한 취미활동을 할 수도 없었고
원하지 않는 폭력적이고 거친 놀이 속에 몸을 담가야 했으며
이로 인해 처벌받아야 했고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활동에 대해 여자들에게 원치 않는 사과까지 해야만 했다.
나로 하여금 페미니즘 여성 피해 서사들을 죽어서도 용납할 수 없도록 만든 여러 일화 중 하나이다.
…
누차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페미니즘은 "여성만이 피해자"라는 서사를 완성시키기 위해, 남자라서 힘들었거나 불편했던 서사들을 담론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보편적 사례라 할 수가 없다나?
여자가 남자를 부러워하면 지극히 정상이지만
남자가 여자를 부러워하면 비정상적이고 편향된 사례가 된다.
세상 좋은 모든 것을 남자의 것으로 규정하고, 여자에게 부여된 모든 것에 대해서 '나쁜 것'이라 도식을 잡아놓고 있으니 당연히 이러한 색안경 하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게 다 여자에게 불리하고 부당해 보일 수밖엔 없다.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지.
그러나, 일개 짐승조차도 눈빛 교환으로 누가 강자이고 약자인지를 인지할 수 있다고 한다.
약자가 강자를 올려볼 때나 강자가 약자를 내려볼 때, 항상 그 특유의 눈빛이란 게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야생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본능으로 바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그것을 읽어내지 못하는 개체들은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지 못했다.)
자랑도 아니고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가 아서 플랙으로 평생을 살아오건대 세상 그 어떤 여자도 나를 '강자를 바라보는 눈'으로 바라봤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항상 나를 경멸과 하찮음의 눈으로 바라보곤 했었지. 그런데 그들이 약자라고? 내가 강자고 그들이 약자라고?
내가 약자라는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나보다 강했던 것들이, 68 혁명의 사도들이 정치적 이유로 뻔뻔하게 약자를 가장, 연기하면서 멋대로 상대를 강자로 규정하는 그 역겨움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약자를 바라보는 그 특유의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내려보고 있지만 입으로는 "내가 더 약자야!"라고 말하는 그 위선, 그 기만을 당신은 용서할 수 있는가!?
난 '페미니즘의 피해 서사'들을 용납할 수 없다.
처음부터 결론을 정해놓곤 피해사례를 체리피킹 식으로 짜 맞추며 만들어지는 그런 비겁한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은 피해자가 아니다.
난 그들을 피해자로 대접해주지 않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은 항상 가해자였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