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제가 아닌 인간문제
아동학대로 인한 사망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어린 의뢰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우리나라 아동학대 신고건수는 2001년 4,133건이었으나, 2015년에는 19,208건, 2017년에는 34,169건으로 약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 지표는 아동학대의 실태가 가면 갈수록 악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가? 아마 반대일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소위 '진보'정권이라는 것이 들어서서 맨날 천날 인권 인권 떠들다 보니, 사람들이 전에는 범죄라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비로소 '범죄'라 인식하게 된 것이고 때문에 (옛날 같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많은 학대 신고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영화에는 부모가 애를 두들겨 팰 때 비명과 구타, 고함소리가 아파트 아랫집 옆집에까지 울려 퍼져서 이웃들이 걱정을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사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옆집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는 일은 흔했다. 자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려 하면 윗집인가 옆집 인가로부터 부모의 고함소리와 아이의 비명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당연히 당시엔 이런 상황을 범죄적 상황이라 인지하지도 못했고 으래 있을법한 훈육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대체로 인권의식이 일천했던 과거로 내려갈수록 아이들에 대한 학대 정도도 분명 전반적으로 더 강했을 것이다.
오늘날에야 저출산이 큰 문제가 된다지만 두세대즘 전만 해도 아이를 열명씩 낳는 것이 대세였는데, 먹고살기도 빠듯한 처지에 아이가 하나 있는 상황과 열이 있는 상황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애정의 정도는 분명 차이가 있었으리라 본다.
우리 엄마만 해도 어렸을 적에 자기 엄마(외할머니)가 애들 키우기 힘들어서 애기였던 자신(엄마)을 죽으라고 어딘가에 던져놓았는데 생각보다 잘 안 죽길래 그냥 다시 키우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었더랬다. 이걸 무슨 굉장히 심각한 가정사의 비밀처럼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라 그냥 술자리 안줏감 느낌으로 껄껄거리며 이야기했었다. 당시엔 그냥 그런 게 당연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엔 사회고발 영화감이지만.
여기서 과거로 내려가면 당연히 더 심해진다.
나름 문명국이었던 산업혁명 당시 대영제국은, 그러나 특유의 변태적(?) 금욕주의의 부작용으로 인해 음식이 더럽게 맛이 없었다고 한다(지금까지도 그렇다고 한다.). 근데 애들은 맛없는 거 안 먹으려 그러잖아?("맛없어! 나 밥 안 먹어!")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어떻게 훈육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려 당시 정부가 발행했던 공식 가이드 지침이 있었는데, 그 방법이란 게 밥을 먹을 때까지 차디찬 골방에다 감금해 놓는 것이었다. 굶어 뒈질때즘 되면 똥이건 된장이건 주는 데로 먹게 된다나? ㅇㅇ정. 부. 의. 공. 식. 지. 침
그 속에서 기어코 살아남은 사람들이 후손을 낳고 낳아 오늘날의 영국이 된 것이라는 씁쓸한 이야기.
문명국이 이 정도니 비문명 야만족들이 어떠했을진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훈족이나 몽골족, 흉노족, 바이킹 이런 애들. 아마 많이 낳아도 어차피 다 성장하지 못할 테니(인생 중도탈락자가 많이 나왔던 시대니까) 부모 입장에서 아이를 '선택해서' 키우는 마인드가 널리 퍼져있었으리라 본다. 열명즘 낳아서 안 되겠다 싶은 자식은 그냥 빨리 죽여버리고 될성싶은 떡잎만 골라서 키우기 이런 것.
여기서 좀 더 과거로 내려가면 영유아 인신공양이 등장한다.(ex : 카르타고, 아즈텍,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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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중요한 점은, 아이에 대한 인권이 어른에 대한 인권과 결코 따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동의 인권이 떨어지는 사회는 아동인권뿐 아니라 그냥 인권 자체에 대한 인식이 떨어진다. 사람을 마구 짓밟고 죽여도 되는 사회라면 반드시 아동인권 역시 개판일 수밖에 없다. 이 둘은 결코 따로 가지 않는다.
사회 속에서 항상 짓밟히고 사는 부모가 자신의 자식들에게 따뜻하길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꽃이 피기를 기대한 것과 같다. 아동이 짓밟히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사람이 짓밟히지 않는 세상을 먼저 만들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