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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Jun 25. 2023

프리고진의 일일천하

3류 소설 같은 현실

러시아의 불타오르던 반란은 의외로 시시하게 막을 내렸다. 의기양양하던 프리고진은 하루 1000km라는 전설적인 속도로 진격하다 정작 모스크바 톨게이트에서 멈춰 섰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었던 바그너 그룹 전부를 정부군에게 내어준 뒤 벨라루스로 도망갔다. 이 모든 과정은 하루아침에 진행됐다고 하기엔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아리송한 것들 투성이라 우리는 그 내막을 완전히 알 수 없으며, 아마 영원히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고민해 봐야 어차피 알 수 없을 것들은 뒤로 하고,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들 중심으로 이 사단을 다시 한번 논해 보고자 한다.




1. 이상할 정도로 빠른 진격속도.


어제 많은 이들이 놀란 게, 반란군의 진격속도가 괴랄할 정도로 빨랐다는 것이다. 하루 1000km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진격 속도인데(이 전 가장 빨랐던 교전 군대의 진격 속도는 몽골기병의 하루 153km..), 어떻게 이게 가능했냐는 거지. 


여기서 먼저 생각해 볼 부분이 뭐냐면, 프리고진의 '반기'가 정말 예측 불가능했냐는 것이다. 


필자 역시 전에 페북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미 반년 전 즈음부터 해서 프리고진과 러시아 국방부(쇼이구)의 관계는 비정상적으로 틀어져 있었다. 극렬러뽕들은 난리가 터질 때까지 부정했을지 몰라도, 알 만한 사람들은 언젠가 한번 큰 사단이 날 수밖에 없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방구석 찐따들조차 그 생각을 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프리고진이 '그 생각'을 못 했을까?(언젠가는 국방부와 결단을 낼 날이 오리라..)


필자는 적어도 반년 전부터 프리고진이 자신을 향한 토사구팽의 기류를 감지했고, '쇼이구 일당'과 한 판 뜰 날이 올 것을 내심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본다. 그래서 최소한의 '보험들'을 챙겨뒀을 것이다. 난리가 일어나면 0부대장은 XX로 보내고, 어느 병참선을 막고, 어디 도시를 틀어쥐고, 관공서를 습격하고, 관련 '대감님들'을 일부 포섭해 두고 등등..


그랬으니까, 미리 들어놓은 보험이 어느 정도는 있었으니까, 정부군의 저항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1000km를 고속도로 풀악셀로 달려서 모스크바 성문 앞까지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하지만 결과적으로 프리고진은 모든 것을 잃었다.


거기까지였다. 프리고진이 준비해 놓은 '보험'은 딱 모스크바 성문 앞까지만이었다. 그 이상은 '아직'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결정적인 반란 분출은 다분히 우발적이었지 계획적이었던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모스크바 '본진'은 무력으로 정복해야 하는데, 이는 '정예병 2만 5천 명'만 가지고 시도하기엔 다소 쫄리는 부분이 있다. 공성전, 시가전의 특성을 고려하건대 설령 승리한다 해도 손실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한니발도 '다 망해가던' 로마의 성문 앞에서 회군했지 않나.


여론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막 시작을 했을 땐 다들 벙쪄서 우왕좌왕하지만, 내전양상이 길어지면서 한 주 두 주가 넘어가면 러시아의 국가 붕괴 양상이 더욱 노골화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슬슬 "프리고진 너 때문이야! 니가 시작했잖아!" "너 때문에 나라 망했어 이 이완용아!"라는 반응들이 올라오게 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부 반미주의자 커뮤들을 보면, 처음엔 현실부정하며 벙쪄 있다가 푸틴 연설로 인해 '반란'이 기정사실화 되자 프리고진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더어러운 유대인의 후손이라서 결국 미제 서방 놈들의 농간에 넘어갔다나? 


분명히 말하건대, 프리고진의 반란으로 인해 우크라 원정 다 말아먹고 러시아 붕괴되면 좋은 건 서방세계와 우크라이나지 러시아인들이 아니다. 그리고 프리고진은 '반미 반서방' 러시아인이지 친서방 시민이 아니란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프리고진의 머릿속은 결코 친서방계 시민인 우리들의 머릿속과 같을 수 없다. 프리고진을 이해하려면 '반미주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반미국가 시민' 프리고진은 자신으로 인해 모든 반미세계가 실패하고 궁극적으로 서방세계가 다시 승리해 버리는 미래를 감당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러뽕들이 항상 희망회로 속에서 살아가듯, 친서방 뽕들도 희망회로 속에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신인균..)  


그리고 프리고진은 스스로 통치자가 되어 러시아 전체를 통제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찌 되었건 반역자라서 정치적 정당성도 없다. 




3. 그런 면에서 사실 프리고진은 '분노'하기보단 '불안'했을 것 같다.


환호하는 친서방 여론과는 달리 모스크바행 고속도로를 달리며 프리고진은 무척 두려웠을 거 같다. 아군 폭격에 빡쳐서 들고일어나긴 했는데 나 이제 어떡하지? 환호하는 이들도 있는데 내가 뭘 해줄 수 있지? 친서방 언론들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달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반란이었던 것이다.(기억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미쿸의 전문기관들은 처음부터 회의적인 반응들을 내놓았었다. 정통성도 명분도 뭣도 없으니까..) 


어쩌면 그가 국방부와 각을 세우기 시작했던 반년 전부터, 그와 바그너의 몰락은 기정사실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반란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죽어가는 늙은 사자가 마지막으로 내 지르는 비명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모스크바의 '정당한 공권력들'은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고, 결국 불안을 이기지 못 한 프리고진은 결정적인 순간에 추하게 모든 걸 내 던지고 국경 너머로 도망치고야 말았다. 


결과적으로 프리고진은 모든 걸 잃었다. 

결과적으로 쇼이구가 아니라 프리고진이 죽었다.


물리적인 목숨은 보존했다고? 가진 것의 전부였던 바그너를 다 내주었는데 그 '물리적' 목숨이라 해 봐야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4. 결국 푸틴의 승리인가?



푸틴과 국방부 엘리트들은 그토록 염원하던 '코'를 풀었다. 반년 전부터 눈앳가시였던 바그너와 프리고진을 제거했다. 그들은 가장 최악의 위기를 통해 가장 바라던 바를 이루어냈다. 그 과정에서 전투기랑 헬기 몇 대가 소진된 거 같긴 하지만, '2만 5천 명의 통제불능 중무장 불한당들'을 지워내는 비용치곤 싸게 먹힌 셈이다. 


물론 온전한 승리라고 할 수는 없다. 대국민 성명까지 내면서 응징할 것을 천명했던 '반란군'들을 실질적으로 혼내주지도 못했고 등을 토닥거리며 달게 주는 그림으로 끝을 보게 되었으니까. 이는 평소 강한 남자, '웃통을 까고 불곰을 말처럼 타고 다니는 상남자 마초 대안우파' 이미지를 팔고 다니던 이에겐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이미지 손상이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이미지는 팔아먹을 수 없다. '그런' 이미지를 어설프게 들먹이려 했다간 이젠 여론의 비웃음을 산다. 


더 나아가, '제대로 응징하지 못 한 반란'은 결국 꼬리를 물게 되어있다. 그게 역사의 법칙이다. 프리고진의 반란이 '그 정도로' 수습 됐다면, '나는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유력자들이 계속 생길 것이다. 


이 손상된 권위를 만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착상태인 우크라 전선에서 단기적으로 큰 성과를 내는 건데 현 구도에선 달리 가능할 거 같아 보이지도 않고 말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데, 반미주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반미주의자의 입장에서 생각하여야 한다. 자기 하나 때문에 모든 반미주의자들의 꿈이 무너지는 상황을 감내할 수 있는 반미주의자는 많지 않은 거지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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