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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Dec 17. 2023

대리운전 산타클로스

이름없는 천사

며칠 전의 일이다.


"아, 기사님. 여기입니다 여기. 아 근데.. 죄송한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 거 같은데 제가... 이거 제 차를 어디다 세워뒀는지 기억이 잘 안 나거든요? 그래서 저랑 같이 좀 찾으러 돌아다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게 첫 빵부터 짜증을 먹고 들어가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고작 22000원짜리 콜(실수령 기준 17600원) 하나를 운전하기 위해 건물 주차영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10분 20분 30분 하염없이 시간을 지체해야만 하는 뭣 같은 상황.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1분 1초가 다 돈인데 이런 식으로 내 시간 뺏어가는 거 니가 돈으로 보상해 줄 거야? 하며 첫 만남부터 인상이 구겨지려는 찰나, 발성이 약간 안철수틱한 이 고객이 말을 이었다.


"자, 손해 보실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먼저 여기 10000원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뭐 이런 걸 다...ㅎㅎ;;"   


..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얼마의 시간이 지체될지는 모르겠으나, 경험적으로 볼 때 이 정도면 내가 손해라 할 정도는 아니게 된다. 사실 꽐라된 고객이 출발시간을 하염없이 잡아먹는 경우는 많아도 이걸 이렇게 돈으로 보상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이젠 살짝 고마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웃으면서' 차를 찾으러 계단을 올라 위층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물론 유감스럽게도 차가 이 한 번에 발견되진 않았다. 이 안철수 고객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여기는 일단 아닌가 보네요. 그럼 기사님이 힘겹게 계단을 오른 게 헛수고가 되셨으니 여기 수고비 10000원이 더 있습니다."

"아.. 아.. 그.. 가, 감사합니다ㅎㅎ;;;"


 ... 이런 상황이 있나? 나는 그저 계단 한 층을 오르고 나서 좁은 주차구역을 한 바퀴 도는 정도의 수고로움을 '잠시' 감내했을 뿐인데 그 대가가 무려 10000원이라니. 살아생전 누려본 적 없는 드높은 가성비에 감개무량함을 느끼며 건물 로비와 1층 이곳저곳을 좀 더 돌아보았더랬다. 안철수 고객님께서 다시 입을 열었다.


"하아~ 여기도 없나 보네요. 그럼 기사님께서 또 여기저기를 걸으시면서 수고를 하셨으니 여기 10000원이 더 있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즘 되면 슬슬 의아하다. 이 사람 대체 정체가 뭐지?? 말쑥한 안철수 고객 신사분께서 또 입을 여셨다.


"제가 보기엔 이젠 00주차구역이 확실할 거 같습니다. 00쪽으로 가시죠."

"저기 고객님. 지금 가시는 방향은 00이 아닐 텐데요? 제가 보기엔 저쪽입니다."

"아뇨. 이 쪽이 맞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만약 이쪽 방향이 아니어서 또 허탕을 친 게 된다면 그땐 제가 또 10000원을 드리도록 하지요."


데꿀멍.

이 상태로 건물을 몇 번만 더 돌아다닌다면 아마 오늘은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고 집에 가서 쉬어도 될 것 같은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필자가 '추가 보상'을 확보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안철수 선생님' 께서 호언장담하셨던 데로, 거기서 차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나. 필자는 이미 15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30000원을 얻었는데 말이다. 




어떻게 생각할 진 모르겠으나, 아주 솔직히 말해서 주행을 하는 동안 필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기억들 하시겠지만, 필자는 일전 모 페미 유튜버 방송을 통해 페미 궁병대 3000명에게서 쏟아지는 화살비를 두 시간 남짓 한 시간 동안 일방적으로 뚜드려 맞았던 적도 있었다. 그것도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긴 했지만, 적어도 그들의 적의는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규모가 좀 많이 크긴 했어도, 그런 일방적인 적의 속으로 내던져지는 상황 자체는 '찐'인생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생소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맥락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 특이한 호의는, 그런 일방적인 적의에 던져지는 상황과는 또 다른 불안과 공포로 내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뭘까? 나한테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대체 뭐지? 자신이 누리는 '노동생산성(시간당 소득)'을 다른 사람에게도 '느껴보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일까? 일단 정말 운전 똑바로 해야겠다. 이렇게 호의를 받았는데 행여 실수라도 하면? 신호라도 어긴다면? 과속카메라에 찍히기라도 한다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주행을 마치고, 고객님을 보내드리고, 이후 짧은 콜 하나를 더 주행한 뒤 더 이상의 추가주행을 하지는 않았다. 팔다리가 후들거려서 더 이상 운전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내가 일방적인 호의를 받았다는 것이고, 아마 날 기억하지도, 앞으로 다시 마주할 일도 없을, 서초구에 사실 이 이름 모를 산타분에게 이 타임라인을 통해서라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그간 대리운전에 대해서는 꽐라나 진상에 관한 썰들만 풀어놔서, 모든 이들이 그렇지 않음을 알리기 위해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다들 남은 하루 즐거이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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