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정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좋아라 하는) 감성팔이가 옳건 그르건, 감성팔이의 영향력은 갈수록 증대되는 중인데 이는 지난 반세기 간 '광고'가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만 보아도 손쉽게 알 수 있다.
예전의 광고는 광고의 구체적이고 기능적인 부분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지금의 광고는 예쁘고 늘씬한 연예인이 나와 시청자를 향해 상큼하게 윙크를 날리며 단 한마디만을 던진다. "이 상품을 써 보세요."
더 이상 왜 그 상품이 우수한지에 대한 "물리 물질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논증"에 목매지 않고 그저 감성적 측면으로만 승부를 보려 하는 것이다.
문제는 제법 진지한 사고와 성찰이 필요한, 이를테면 정치 사회분야와 같은 분야도 그렇게 되어있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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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바보가 되어버린 미래를 다룬 "이디오 크러쉬"라는 영화에선 어떤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바보가 되어버린 미래인들은 독점기업이 생산하는 어떤 주스를 농업용수로까지 사용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그 결과로 한 해 농사를 모두 망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유일하게 정상 지능을 보유하고 있던 주인공이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주인공 : 어째서 주스를 농업용수로 사용한 거죠?
미래인 : 전해질 이온음료라서 건강에 좋다고 광고에서 봤거든요.
주인공 : 대체 그 전해질 이온음료라는 것이 뭔데요?
미래인 : ….
"우리의 음료수는 전해질 이온음료라서 건강에 좋다."는 독점기업 광고의 막연한 문구에 중독된 사람들은 "전해질 이온음료란 대체 무엇이고 어째서 건강에 좋은가?"라는 기본적인 의문조차 상실한 체 그 음료수를 농업용 수로까지 사용하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대기권을 뚫고 폭증해버린 생산비는 덤)
더 이상 진지하게 의문하거나 성찰하지 않는 사람들. 정치세력들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든다.
정치세력이 빨간색 옷을 좋다고, 혹은 나쁘다고 주장할 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빨간색 옷이 대체 왜 좋아야 하고 또 나빠야 하는지 구구절절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그 대상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혹은 부정적인 '막연한'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뿌리고, 과잉시킨다.
지지세력으로 하여금 그저 피상적인 피아 구분 도식 속에서 '그 대상'을 아군으로, 혹은 적으로 인식할 수만 있도록 만든다.
그 결과로 탄생하는 현상이 내가 누차 언급해 온 바로 '그 현상'들이다. 이슬람 학자와 동성애 운동가가 '같은 진보'로 분류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포르노 자본가와 기독교 원리주의자가 '같은 우파'로 분류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도식은 이상하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막연히 그들은 적이거나 혹은 아군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왜 그래야 하지?"라고 의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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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슬로건(?)이었던 '극중주의'….
기성 좌우의 구분 도식에 문제를 느껴서 새로운 제3의 길을 찾아본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문제는 그 '제3의 길'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서 그저 막연하게 힙한 이미지를 만들어 승부 보려 했던 그 얄팍한 근성으로부터 나온다.
기성 좌우가 잘못됐다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왜 잘못됐는지'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면서, 연예인처럼 그저 막연하게 힙해 보이려고 이미지 형성에만 몰두한다.
새정치라 말 하지만 그 새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자! 이것이 낡아빠지고 케케 묶은 그 포스트모더니스트 신좌파식 감성 이미지 정치랑 대체 무엇이 다른가!
이것이 내가 처음부터 안철수를 "남자 박근혜"라 칭하며 싫어했던 이유이다.
+feat. 창조경제, 선진병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