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내분에서 국가간 총력전으로
"백년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다."
역사를 배운 이에겐 거의 디폴트로 되어있는 이 명제는 사실 절반 정도만 참이라 말할 수 있다. 절반 정도는 거짓이라고ㅇㅇ 어째서 그러한가?
이 전쟁이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이었던 것'으로 종결된 건 맞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이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건 아니었다.
일전에도 했었던 영국역사 이야기를 해 보겠다.
우리는 흔히들 영국 하면 앵글로색슨이라는 민족? 개념을 연상한다. 그리고 '그' 영국의 앵글로 색슨족은 중세시대 바이킹족의 끝없는 침공 속에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 몰락의 최종적 방점을 찍은 건 '노르만계 프랑스인'이었던 노르망디의 윌리엄 대공.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군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침략자' 월리엄에게 궤멸을 당했고 이후 잉글랜드는 월리엄의 차지가 된다.
'정복자' 윌리엄은 자신에게 맞선 영국의 앵글로색슨 토착세력을 처절하게 도륙했다. 앵글로색슨들은 학살을 당하거나, 혹은 (엊그제만 해도 적이었던..) 스코들랜드 등지로 도망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노예나 다름없는 상태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들의 빈자리는 대륙에서 건너온 프랑스인들로 채워졌고, 이후 지금까지 영국을 지배한 건 그들의 후손들이다.
이 '중세 프랑스 강점기(??)'를 거치며 종래의 앵글로색슨 토착문화는 사실상 소멸에 이르게 된다. 전술한 바 있지만 이는 언어에도 영향을 끼쳐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영어'라는 언어는 이 시기동안 전체 어휘의 80%가 프랑스어에 의해 오염되게 된다.
(pig : 돼지/pork : 돼지'고기' - 돼지를 기르는 건 영어 쓰는 '천 것들'이고, 그들이 길러온 돼지를 고기로 소비하는 건 프랑스에서 건너오신 고귀한 귀족 대감마님들이었다는 역사적 맥락)
여하튼 이렇게 '철저하게 프랑스화 된 영국'은 당시 시대에 별도로 독립된 nation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저 프랑스 세계의 확장으로써 변방의 섬 쪼가리 정도로 여겨졌을 뿐이다. 그 섬을 통치하던 통치자들도 자신들을 프랑스인으로 인식했지 독립된 영국인들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조선 총독부의 통치자들은 '일본인'이지 '조선인'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정당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프랑스의 왕이 서거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프랑스의 유력한 귀족가문들이 프랑스세계 전체의 왕관을 두고 알력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당시 영국(잉글랜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의 대 귀족' 가문도 이 알력다툼의 일획을 담당했는데, 그럼에도 '영국의 왕을 겸직하고 있던' 그 귀족가문은 최종적으로 탈락했고 프랑스의 왕관은 다른 가문에게 돌아가고 만다.
'영국을 차지하고 있던 프랑스의 대귀족'은 이러한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세력을 긁어모아 왕관을 차지한 귀족가문에게 반기를 들게 된다.
물론 이 시점은 월리엄의 정복으로부터 300년이 지나 있었고, 그동안 지리적 이격으로 인해 '프랑스인이 아닌 영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서서히 다시 형성되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반란을 일으킨 대 귀족 가문에서 "나는 영국을 대표하여 프랑스 놈들을 갈아버리려 전쟁을 시작한다!"라고 외친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왕관의 자격을 가진 프랑스의 귀족으로써, '영국과 프랑스의 정당한 통치자'라는 정치적 슬로건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실제 그들은 프랑스 본토에도 꽤 넓은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 프랑스의 1/3정도. 그래서 초기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정당한 통치자'라는 정치적 슬로건이 꽤 유효했을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며 이 가문이 점점 열세에 놓이면서 발생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정당한 통치자' 가문은 100년이나 되는 전쟁을 치르며 점점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해 간다. 당연히 필연적으로 신병의 충원은 안정적인 영토 '잉글랜드'에서 수급될 수밖에 없다. 가면 갈수록 '영어 쓰는 잡것들'이 그들 군대의 주축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 세기가 넘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치르며, 프랑스땅에 사는 민중들은 이 전쟁을 더 이상 '왕좌의 게임'과 같은 귀족내전으로 인식하지 않게 된다. 점차 '영어 쓰는 이방인들의 침략'이라는 인식이 우세해지는 것이다. 귀족내전이 아닌 영국의 프랑스 침략&프랑스인의 항전. 이러한 정치적 프레임의 형성을 접한 '영국군' 수뇌부는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아니, 이 땅의 민중들이 우리를 '프랑스 대귀족 가문'이 아닌 '침략자 영국 놈들'이라 여기고 있다고?! 아, 우리는 졌구나!
... 다들 알다시피, '프랑스 대귀족 가문'이 아닌 '침략자 영국군'이 된 그들은 프랑스 내 모든 영지를 상실하고 전쟁에서 패배했다. 한때 프랑스세계의 일원이었던 브리튼섬은 이제 지리적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프랑스세계'로부터 완전히 이격 된다.
그렇게, 전쟁의 패배로 인해 '프랑스세계로부터 이격 된 영국 nation'이라는 개념이 유럽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