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치유심리학자 김영아의 힐링 책방(4)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지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소중한 땀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귀한 오늘을 징검다리 삼아 나아가는 내일에 대해 구체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책을 소개하려 합니다.
작년 이맘때 만난 내담자는 이제 막 쉰 줄에 접어든 사업가였습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해 5년 가까이 고전했지만 두 해 전부터 막대한 수익을 올리며 소위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분이었지요. 얻은 것 못지않게 잃은 것 또한 많았습니다. 다니던 회사를 무작정 관둔 뒤 무리해서 사업을 시작한 데다 밤낮없이 일에 매달리는 동안 가족과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고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돈을 벌면서부터는 신이 났어요." 자신이 얼마나 허랑방탕하게 살았는지 내담자는 담담한 어투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자 그 즐거움이 다 시들해졌다더군요. 고생했던 시절에 앓았던 불면증이 또다시 내담자를 괴롭혔고, 열정적으로 해왔던 일에도 흥미가 사라졌지요.
제가 그분에게 추천한 책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입니다.
초연 직후 평단과 관객에게 충격을 던져준 문제작이자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유명한 작품인데요. 줄거리는 한 줄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라고 하는 두 방랑자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것이 내용의 전부이지요. 그들은 극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하릴없이 고도를 기다립니다. 노예를 데리고 나타나 두 주인공에게 거만하게 구는 인물 '포조'는 그들에게 고도가 누구인지 묻는데요. 두 사람은 의외의
대답을 하지요.
포조 : (단호하게) 고도는 누구요? / 에스트라공 : 고도라뇨? / 포조 : 날 고도로 잘못 보지 않았소? / 블라디미르 : 천만에요. 선생님,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일 없습니다. / 포조 : 그게 누구냐니까? / 블라디미르 : 그건… 저… 그냥 아는 사람이죠. / 에스트라공 : 알긴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랍니다. / 블라디미르 : 그러면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 에스트라공 : 저 같으면 알아보지도 못할 텐데요.
저는 내담자에게 포조와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이 기다리셨던 고도는 무엇이었나요?" 제 질문에 그분은 망설임 없이 "그야 행복한 삶이죠."라고 대답했지요. 하지만 내담자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이냐고 다시 묻자 이번에는 금방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가족의 건강이나 화목인가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 또는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한 지위와 명예를 갖는 일인가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도를 기다리기만 하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모습은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포조와 포조의 노예 럭키는 날마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주인공의 지루함을 잠시 덜어줄 뿐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미 없는 대화와 장난도 마찬가지죠.
블라디미르 : (…)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게 아니야.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따져보는 거란 말이다.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고도를 만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들은 때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어버리기까지 하는데요.
에스트라공 : 그만 가자. / 블라디미르 : 가면 안 되지. / 에스트라공 : 왜? /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 에스트라공 : 참 그렇지.
일상에 지칠 때마다 이루고 싶은 꿈, 그러나 막연한 그 꿈을 상기하며 힘을 내듯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1막이 끝나고 다음 날인 2막이 시작되어도 기다림은 계속됩니다.
에스트라공 : 어젠 이 나무가 없었던가? / 블라디미르 : 있었지. 너 생각 안 나냐? 하마터면 목을 맬 뻔했잖아. (…) / 에스트라공 : 너 지금 꿈꾼 얘길 하는구나. / 블라디미르 : 이럴 수가 있나? 벌써 잊어버렸다니!
두 주인공은 항상 있는 나무가 거기 있던 게 맞는지조차 헷갈립니다. 책 속에서 두 주인공을 찾아오는 사람은 고도가 아니라 고도가 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소년뿐인데요. 오늘 만난 소년이 어제 만난 소년이라는 사실도 확신하지 못하죠. 그날이 그날 같은 하루의 연속이니까요.
블라디미르 : 너 나 모르겠지? / 소년 : 모르겠어요. / 블라디미르 : 너 어제도 왔지? / 소년 : 아니요. / 블라디미르 : 그럼 처음 오는 거냐? / 소년 : 네.
블라디미르는 의심하면서도 소년에게 묻습니다. "내일은 틀림없겠지?"라고요. 짧은 대사들 위주라 책을 금세 읽은 내담자는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당혹스러워했지만 저와의 상담을 통해 곧 자신의 상황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저 사업이 잘되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으며 열심히 살았던, 그러나 막상 그렇게 된 뒤에도 행복해지지 않은 그분에게 저는 현재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이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인가요?"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가족들과 화해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크지만, 아직은 생각을 더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면 이번에는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찾으러 가야겠네요."라고 말이죠.
블라디미르 :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 에스트라공 : 만일 온다면? / 블라디미르 : 그럼 살게 되는 거지.
두 사람은 꾸준하고 성실하게 그들에게 주어진 기다림의 의무를 다하지만 고도가 오지 않아 절망합니다. 아마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도 고도를 만나지 못할 것만 같은데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모른다면 영영 그것을 누릴 수 없듯이 말이지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고도를 기다리는 장소는 나무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언덕입니다.
그 황량함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르고 기다림을 계속하는 이들의 심리와도 같을 것입니다. 자신이 만나고자 하는 고도가 무엇인지 알게 된 후에야 비로소 그 황폐한 언덕을 떠나 고도가 있는 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겠지요. 그 순간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오늘의 일상 또한 고도를 만나러 가는 의미 있는 한걸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