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남편의 뒷모습을 보면 그가 오늘 보낼 하루가 어떨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일은 얼마나 고된 건지 걱정이 스물스물 느껴지곤 했다. 지금은 제주로 내려와 많은 부분들을 내려놓고 삶의 질에만 치중한 채 살아가고 있으나 그래도 삶이란 여전히 불안하고 고될 때가 많다. 욕심을 내려놓은 제주에서의 삶은 여유롭고 가볍지만, 반대로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때때로 마음이 심란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육지에 살았던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난 남편의 뒷모습을 언제나 원망했다. 독박육아를 하는 나를 놓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 해도 뜨기 전에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 주말에도 등만 보이고 잠들어 있는 그의 뒷모습, 싸우다가도 뒤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 내게 그의 뒷모습은 언제나 원망이었고 분노였고 넘지 못하는 벽이었다.
서로를 마주보고 살기위해 우린 제주로 왔다. 제주로 온 후 그는 출퇴근 시간이 일정해졌고 주말과 공휴일에도 쉴 수 있는 꿀 같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들여다보는 그의 뒷모습은 편안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편할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조금은 아쉬우면서도 무거워 보이는 그의 뒷모습에 제주에서의 생활이 그에게도 과연 좋은 것인지 내심 걱정이 올라오곤 했다. 그랬던 남편의 뒷모습에 서서히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건 수영을 시작한 후부터였다. 우린 자유수영 시간은 매일 함께 하지만 아이의 등교를 위해서 아침 정규수업은 서로 격일로 나가고 있다. 얼마 전 남편이 수영을 나가는 날 내려놓은 커피를 두고 나갔 길래 커피를 들고 따라 나간 적이 있었다.
“오빠! 커피 두고 갔어~”
“앗 그래? 알았어 고마워 나 갔다 올게. 찡긋!”
찡...긋?? 오랜만에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왠지 그의 뒷모습에서 흥이 느껴지고 듬칫듬칫 리듬을 타듯 걷는 것이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 손에 들린 수영도구와 오리발이 그 리듬에 맞춰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고 남편은 내가 뒤에서 보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흥이란 게 올라온 채로 오리발을 든 채 차를 몰고 사라졌다. 잘 봤나? 설마 지금 리듬 타며 걸은 것인가? 나는 그의 요상한 뒷모습에 잠시 내가 뭘 착각했나보다 하며 서둘러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남편의 뒷모습은 잘못 본게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종종 훔쳐보게 된 남편의 뒷모습은 수영수업을 가는 날이면 오리발을 앞뒤로 흔들며 흥이란걸 타고 있었고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자꾸 찡긋 거리며 되도 않는 윙크까지 날리며 사라졌다. 저놈이 미쳤.. 아니 저분께서 드디어 맛이 가고 있는 것인가 심히 걱정스러웠지만 그에게 벌어지고 있는 변화가 나쁜 현상은 아니란 생각에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남편의 변화는 뒷모습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생활패턴도 미세하면서도 미세하지 않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저녁 반주를 즐겨하는 남편은 밥을 먹은 후 2차로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 늦게 자는 편인데 요즘엔 자는 시간이 점차 빨라져갔다.
“오빠 벌써 자려고? 맥주 더 안 마셔?”
“그럼 그럼~ 내일 수영수업인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지~ 나 먼저 잘게~ 찡긋!”
찡..긋... 저새ㄲ.. 아니 저분께서 눈알에 마그네슘이 부족한가 눈은 왜 자꾸 꿈뻑거리면서 하루종일 흥이란게 나있는 거야. 맥주를 마실 때도 스포츠 경기만 지루하게 쳐다봤던 그는 이젠 시간 나는 대로, 아니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수영강습 유튜브에 꽂혀 미소를 지은채 요리조리 따라하면서 즐겨보고, 저녁에 일찍 잠이 들어서인지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무척이나 개운하게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고 있다. 그는 진정한 수친이(수영에 미친 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그의 변화가 처음엔 좀 당황스럽기도 해서 마그네슘이 부족한 그를 위해 영양제도 사다주며 정신이 돌아오길 바라기도 했지만 무언가 부족해보이던 남편에게서 활력과 에너지가 차오르는 걸 보는 건 기분 좋은 변화였다.
“포비야, 나는 요즘 제주생활도 안정되고 많은 게 좋아진 것 같아.”
“아 그래? 난 오빠가 아는 사람도 없는 제주 와서 더 힘든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는데”
“처음엔 좀 그런 것도 있었는데 요즘 수영을 하면서 스트레스도 없어지고 일정한 패턴이 생기니까 좋아지는 게 많은 것 같아. 서울에서 계속 살았다면 내가 지금처럼 취미생활을 하면서 회사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들더라고. 서울에선 너무 바빠서 아무것도 해볼 생각도 못했는데 지금은 수영이라는 좋은 운동도 하게 되고 이게 다 제주를 선택한 포비덕인 것 같아. 찡긋!”
“찡..긋.. 다행이다 오빠. 나도 오빠가 너무 물 만난 갈치 같아서 좀 꼴 보기 싫을때도 있긴 한데 수영하면서 오빠가 많이 활기차진 것 같아서 같이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긴 해”
“포비가 수영 추천해줘서 하게 됐잖아~ 얼마나 재미난지 몰라! 내일도 일찍 가서 열심히 수업 듣고 출근 하려고 므하하하하~”
눈에는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50중반을 향해가는 그에게 새로 생긴 취미생활이 너무 감사하다. 언젠가 원망만 가득했던 그 뒷모습이 이제는 새로운 삶을 향해 가볍게 리듬을 타며 흔들리고 있었다. 오리발을 듬칫듬칫 흔들며 사라지는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멀어지는 벽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걸어가는 동반자의 모습으로 보인다.
“오빠, 내일 자유수영때 나 팔 젓는것좀 더 알려줘~”
“콜! 찡긋!”
망할 찡긋. 그래도 당신이 좋다니 나도 참 좋다. 찌잉-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