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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나는 내 삶의 주지스님

by pobi미경

오늘 수영인생 최대 충격을 받았다. 너무 슬퍼 눙물이 앞을 가리는 것만 같고 이 구멍 난 가슴을 어찌 치유해야할지 상처받고 쪼그라든 고슴도치가 된 기분이다. 오늘도 중급수영 수업은 너무나 힘들었다. 체력적으로 힘든 게 문제가 아니었다. 가슴에.. 내 가슴팍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번 달부터 새롭게 바뀐 중급선생님은 실력이 너무 좋으신 분이다. 그래서 그런가 회원들에게 가르쳐 주는 수업의 난이도가 무척이나 올라갔다. 난 겨우 중급으로 넘어오긴 했지만 부족한 운동실력 탓에 남들보다 항상 한 템포 늦게 배우는 나로서는 선생님의 고급레벨 수업에 적응 하는게 무척 힘들었다. 예전 선생님은 뒤에 좀 쳐지는 사람들은 따로 묶어서 천천히 진도를 나가게 해줬는데 이번 선생님은 “쳐지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좌우명이라도 있으신 것인지 쳐지는 사람들도 되든 안 되든 무조건 돌리고 또 돌린다. 반복된 실수와 따르지 않는 몸에 넋이 나가버린 나는 오늘은 용기를 내서 수업이 끝난 후 선생님에게 말을 살포시 걸어보았다.


“저기 선생님.. 저처럼 잘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따로 알려주시거나 천천히 가르쳐 주시면 안될까요...?”

“회원님! 중급은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합니다! 모두들 다 하는 건데 회원님만 따로 알려드릴 수는 없는 것이고 그걸 원하신다면 프런트에 문의해서 반을 새로 만들어 달라고 하시죠!!”

“프..프런트예요? 그저 전 좀 천천히 배우고 싶을 뿐인데 반까지 어떻게...”

“저도 여기 온지 3주밖에 안됐지만!! 중급에서 이렇게 뒤처지면 수업에 참여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정 그러시다면!!”

“정.. 그러시다면..?”

“초급!!으로 다시 내려가시죠!!”

“초..초급으로요? 8개월 만에 겨우 올라왔는데 다시 내려가요..??”

“실력이 안 되면 내려가야죠!! 아니면 프런트에 문의하시든가요!!!”


선생님의 말들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퍼벅퍼벅 찔러댔다. 멍해진 머릿속으로 ‘지금 뭐라고 해야 하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가슴만 쓰라렸다. 옆에서 나와 선생님의 대화를 들은 언니들은 서둘러 나를 위로해주며 괜찮다고 하다보면 적응될 것이고 그러면 점차 나아질 것이라고 다독여줬지만 내 마음은 이미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후였다. 언니들에게 위로를 받으니 오히려 속상함이 더 커져선지 눙물이 날것만 같았고 샤워장에서 눙물콧물을 함께 흘려보낸 난 집으로 와 내 수영인생을 돌아보았다.

‘정말 초급으로 가야만 하는 것인가...’ ‘남편이 개인강습 끊어놨는데 그게 의미가 있을까...’ ‘난 그렇게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것인가...’ ‘난 왜 수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결국 비관적으로만 변해갔고 결국엔 수영에 무능한 나를 탓하는 지경까지 되고 말았다.


모든 이들은 각양각색의 운동을 한다. 누구나 운동을 하려하고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왜 수영을 시작했고 잘 하지도 못하지만 여전히 수영 때문에 왜 고민을 하고 있는 걸까. 단순한 이유겠지만 난 수영이 재밌다.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속도도 늦고 재능도 없지만 그래도 수영하는 시간이 즐겁고 신이난다.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하는 운동인데 잘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꾸만 위축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위축이 들어도 참고 계속 해야만 하는 걸까. 아니면 위축이 드는 요소를 없애는게 맞을까. 난 그저 수영을 하고 싶은 것인데 선생님이 내게 건넨 몇 마디의 말 때문에 상처를 받고 수영 자체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말처럼 초급으로 내려가서 배운걸 다시 배우거나 그런 말들에 신경쓰지 않고 지금의 중급을 계속 해나가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둘 다 불편했다. 중급 선생님이 바로 옆 레일에서 다시 초급으로 내려가 처음부터 배움을 또다시 한다는 건 내 수영의욕을 더 꺽을것만 같았고 그렇다고 해서 현재 선생님 수업에 계속 나가면서 그 강도를 따라갈 자신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영을 좋아하는 내 순수한 마음에 가벼운 대꾸로 상처를 주신 선생님이 곱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가 죽는다더니 선생님이 던진 돌멩이는 정확히 날아와 내 심장을 저격하고 말았다.


남편은 개인강습을 끊어놨으니 한두 달 개인강습을 한후에 중급에서 다시 하면 된다고 하는데 개인강습비용은 64만원으로 절대 작은 돈이 아니었다. 아니, 말도 안되게 큰돈이었다. 10만원대면 단체로 즐겁게 수영을 할 수 있는데 선수 출마할 것도 아니건만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큰돈을 써야하는지도 혼란스러웠다. 난 그저 즐겁게 원래 해왔던 것처럼 수영을 하고 싶을 뿐인데.. 수영을 하고 싶은 것뿐인데.. 그러게. 수영을 하면 되는거잖아? 수영장이 여기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아름다운 제주시에는 수영장도 많고 내게 맞는 더 좋은 선생님도 많을 것인데! 옮기면 되는 거잖아! 그저 내가 다시 수영을 즐겁게 할 수 있는곳을 찾아 옮기면 모든 게 해결되는 일이었다. 내 기필코 더 좋은 수영장과 선생님을 찾아서 일취월장하게 실력을 키워버리리라!! 매의 눈으로 동네 수영장을 다시 검색을 했고 지금 수영장 규모보단 작지만 소규모 인원으로 수업을 해준다는 다른 수영장에 연락을 해보았다. 성인 반을 오픈한지 얼마 안된 곳이라 아직 인원의 여유도 있었고 초,중급에 대한 구분을 짓지 않고 개별 강습식으로 맞춰준다고 했다. 오!! 그래 이곳이야!!! 나는 수영장의 소중한 고객님이건만 나를 고민에 빠지게 만든 곳에 왜 거금 64만원까지 바치며 매달리려 했던가!! 곧바로 새로운 수영장에 체험수업을 예약했고 난 다음날 다니고 있던 수영장 프런트에 당당히 다가섰다.


“사장님! 저 다음 달부터 요앞 ‘다받아줘 수영장’으로 옮기기로 했어요! 그래서 다음 달 중급반은 등록 안할꺼구요 그때 남편이 개인강습 해놨던 것도 취소하려고요!”

“이런. 회원님 여기 오래 다니셨는데 왜 갑자기..”

“얼마 전에 바뀐 중급선생님께서 제가 잘 못 따라가니까 초급으로 옮기던지 프런트에 문의하라고 하셔서요. 그래서 이렇게 프런트에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다받아줘 수영장’은 저처럼 진도가 느려도 선생님이 개개인에 맞춰서 잘 가르쳐 주신다고 하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아..네네.. 죄송합니다 회원님. 혹여나 언짢으셨다면 기분 푸시구요. 다음에 좋은 기회 있으면 꼭 뵙기를 바랄께요..”


속이 시원했다. 긴 시간 함께했던 언니들에겐 미안하고 아쉬웠지만, 사정을 털어놓고 인사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남편이 여전히 그 수영장을 다니고 있으니, 언젠가 자유 수영하러 들러 웃으며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자꾸 움츠러들게 만들던 절을 벗어나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중이 아니라, 내 삶의 주지스님이었다. 그렇다면 더 좋은 절을 더 편안한 도량을 찾아 떠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에게 배우느냐’는 결국, ‘나를 어떻게 대해주느냐’와 같은 말이었다. 누군가에겐 별일 아닐 수 있는 한 마디가 어떤 날엔 하루를 무너뜨리고 내 삶의 리듬마저 흔들어놓는다. 내 삶의 기준은 내가 지켜줘야 했다.


나는 옮기는 수영장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번엔 처음부터 선생님께 내가 잘 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얘기하고 양해를 바라고 수업을 시작해보고 싶다. 나는 수영을 잘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수영이 좋기 때문에 하는 사람이니까 내 속도에 맞춰 내 호흡에 맞춰서 차근차근 배우고 즐겨나가고 싶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수영이 아닌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새로운 곳에서 다시 수영을 시작해보려 한다. 이번엔 더 따뜻한 물속에서, 나와 호흡을 맞춰줄 선생님과 사람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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