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7시. 문밖에서 남편이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린다. 차문을 잠그는 소리, 문을 향해 걸어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비번을 누르는 소리. 그리고 밝게 외치는 소리.
“포비야~! 시율아~! 아빠 왔다~!!”
애교 없는 따님은 퇴근한 아빠를 힐끗 보면서 싱긋 웃고말고 나 또한 애교 따윈 긁어모아도 없는 여자라 “왔어?”라는 한마디를 건네며 저녁을 준비한다. 뛰쳐나가 반기진 못해도 남편이 퇴근해서 오는 시간은 언제나 기다리게 되는 반가운 시간이다. 남편이 오면 다소 조용했던 집안이 가득 채워지며 활기가 돈다. 변함없이 저녁을 먹고 시답지 않은 얘기들을 주고받고 기분변덕이 날로 심해지는 딸의 눈치도 보면서 식탁에 빠질 수 없는 내 사랑 반주와 함께 저녁시간을 가득 채운다. 별거 없는 일상적인 하루의 마무리지만 이 시간을 위해 저마다 각자 알찬 하루를 보내고 저녁식탁으로 매일 돌아온다. 이 반복적인 시간이 내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지만 어렸을 때 난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는 인기척 소리를 세상 가장 소름 돋아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그 어떤 공포영화의 BGM이라도 아빠의 구두소리만큼 음산하고 무겁고 소름 돋진 않을 것 같았다. 아빠가 걸어 들어오는 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면 언니와 나는 빛의 속도로 집을 정리하고 책상 앞으로 뛰어가 90도로 앉아있었다. 아빠의 퇴근길은 언제나 저기압과 고기압을 모두 갖춘 태풍이 몰아치기 전 기분상태였으며 대부분의 천둥번개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시작되곤 했다. 집이 왜 이리 지저분하냐 공부는 왜 안 하냐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봤냐 말대꾸하는 거냐 기타 등등 모든 걸릴만한 건수들을 다 끄집어 모은채 언니와 나를 들들 볶아댔고 잔소리 만으로 화가 풀리지 않는 날엔 결국 구둣주걱을 휘두르며 우리를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난 아빠의 모든 게 싫었지만 특히나 아빠의 구두와 구둣주걱은 그저 존재자체로도 공포였고 두려움이었다. 무언가 아빠의 화를 돋울만한 일이 있는 날에는 하루 종일 신발장에 걸려있는 구둣주걱을 보며 저 구둣주걱이 오늘 나를 얼마나 아프게 할지 왜 구둣주걱이 만들어 내는 상처는 누가 봐도 매타작을 당한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 모양을 만드는 것인지 좀 새롭게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어준다면 색다른 모양을 남길 수 있진 않을 지하며 별 필요도 없는 생각으로 하루를 홀로 공포에 떨곤 했다. 그 어떤 상상을 해도 상상 이상의 괴력을 보여주던 아빠덕에 구둣주걱은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였고 뭔 나무로 만든 것인지 튼튼함도 남달라서 단 한 번도 부러진 적도 없었다. 구둣주걱의 활개는 내 어린 시절 내내 계속되었지만 반항기 가득한 고등학생이 된 언니와의 마지막 세계 전쟁을 처절하게 끝마친 후 그의 활약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 시절 구둣주걱을 이겨내던 언니의 모습이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내겐 스파르타쿠스 못지않은 든든함이었다.
지금 매일 저녁 가볍게 들어오는 남편의 발에는 단 한 번도 구두가 신겨져 있었던 적이 없었다. 구두 신은 남자를 언제나 경멸했던 나는 언제나 깔끔한 운동화를 신고 다니던 남편을 만났고 남편은 다행히도 양복을 입어야 하는 날이 있어도 발에는 항상 운동화를 착용한다. 자박, 자박, 자박. 가벼운 그의 발걸음 소리는 언제 들어도 반갑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버텼다고, 이제 식탁 앞에 앉아 웃어도 된다고 그 소리가 말해주는 것 같다. 어릴 적엔 아빠의 구두소리에 간이 쪼그라들었지만, 지금은 남편의 운동화 소리에 군침부터 돈다. 이제 그 소리는 공포영화의 BGM이 아니라, “삼겹살 굽기 시작!”을 알리는 우리의 시그널 뮤직이다.
구두를 신고 매일 저녁 구둣주걱을 휘두르던 사람의 기억은 점차 내 삶에서 지워져 가고, 지금 내 곁엔 양복을 입고도 운동화를 고집하는 센스 가득한 남편이 있다. 내가 어릴 땐, 아빠가 오는 소리에 온몸이 굳었지만 이제 내 아이는 아빠가 오는 소리에 식탁 앞으로 다가온다. 무겁고 날카롭던 구두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이에게 남을 기억은 구두 소리도, 회초리도 아닌 고기 굽는 냄새, 가볍게 울리는 운동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를 따라 웃는 우리들의 얼굴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