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bi미경 Aug 26. 2024

골수녀 / 언니니까 사주세요

골수녀와의 첫 만남

   

골수녀와의 첫 만남은 나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그 무관심을 유지시켰어야 했다.     



육아 4년간 어린이집에도 보내지 않고 홀로 독박육아를 하고 있던 나는 아이가 5살이 되면서 드디어 꿈에도 그리는 유치원 입성을 앞두고 있었다. 어떤 유치원을 보내야 아이가 적응을 잘할지 고민이 많이 됐다. 워낙 몸이 왜소하고 성격이 예민한 아이여서 문화센터에서도 무섭다며 괴성을 지르며 울고 튀어나올 때도 많았고 놀이터에서도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기는커녕 누가 다가오면 겁을 집어먹고 내게 달려오기 일쑤였다. 어린이집은 시도도 못해보고 포기하고 보내지 않았지만 유치원까지 보내지 않을 순 없었다. 없는 정보망을 쓸어 모아 동네에서 괜찮다고 소문난 유치원을 골라골라 3 지망까지 열심히 써넣었다. 결과는 3 지망으로 어쩔 수 없이 써넣었던 숲유치원으로 당첨이 되었다. 숲유치원은 말 그대로 숲에서 자연환경을 체험하는 곳으로 밝고 활발한 성향의 아이들에게 딱 맞는 자연친화적인 유치원이었다. 고로 내 아이에게는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곳이었다. 숲은커녕 동네 공원조차 낯설어서 한 발짝의 발도 떼지 않는 아이였고 파리 한 마리의 등장에도 내 등뒤에 숨어 오들오들 떠는 아이였기에 나는 3 지망 당첨 후 어찌해야 할지 정신이 혼미해졌다.     


오갈 데가 없어진 내게 한줄기 빛이 갑자기 내려왔다. 집 근처에 유아 교육기관으로 꽤 유명한 짱비싸 놀이학교가 생긴다는 소식이었다. 놀이학교는 일반유치원의 장점과 영어유치원의 장점을 다 합쳐놓은 최첨단 교육기관이라는 엄마들의 소문을 들은 난 당장 입학설명회에 참석했고 결과는 이곳이 바로 내 아이가 다닐 곳이라며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내 귀는 창호지만큼 얇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바로 수업료였는데 눈알이 튀어나오게 비쌌다. 한 달에 150만 원 돈의 금액을 내야 했지만 가진 거라곤 빚과 배짱뿐이 없던 우린 더욱더 대담하게도 우선 보내놓고 돈은 해결해 보자며 바로 등록을 하게 됐다. 정말 대책 없이 멋진 추진력이다. 원비가 상당한 곳이라 그런지 이곳을 보내는 엄마들의 차림새도 상당히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입학식날부터 기가 죽었지만 넓은 어깨 이럴 때나 쓰자며 어깨를 쫘악 피고 주변을 둘러봤고 그중 한 무리에 시선이 갔다. 인별그램에서 자주 봤던 한 엄마였다. 물론 인별그램과는 상당히 다른 실물에 알아보긴 쉽지 않았으나 그 엄마의 아이가 워낙에 외모가 출중했던 아이라 인상이 깊게 남아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가 바로 골수녀였다.      


골수녀는 이미 인싸였다. 인별그램 속 골수녀의 남편은 간도 쓸개도 그녀에게 바치는 사랑꾼이었고, 골수녀의 딸은 저 부부에게 어떻게 이런 조합이 나왔는지 1% 확률을 뚫고 나온 미모의 딸이었다. 그녀는 요리솜씨도 죽여줬고 아이교육엔 선수였고 셀카기술은 국가대표급이었다. 골수녀의 인별그램을 보며 질투와 부러움으로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던 나는 내 아이와 같은 반이 된 그녀에게 조심스레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듯싶더니 약간의 (비) 웃음을 띤 채 내 인사를 받아만 주었고 그게 골수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인싸들과의 만남만 주로 하는 것 같은 그녀에겐 나란 존재는 가까워질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골수녀와의 인사 이후로 왠지 기분이 찜찜해졌고 그녀와 부딪힐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난 인별그램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 블로그를 꾸준히 하고 있었다. 육아를 하면서 느끼는 외로움이나 좌절감, 소소한 즐거움등을 블로그에 올리고 있었고 솔직해 보이는 글들 덕분인지 블로그를 찾는 이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에게 이웃신청 메시지가 왔고 그 상대는 바로 그녀였다.

‘언니! 저 골수녀예요. 언니 블로그 한다는 얘기 듣고 찾아봤는데 이웃도 많고 포스팅들도 너무 재밌네요! 저희 이웃 맺고 친하게 지내요! 방긋방긋’

으응? 너는 얼마 전만 해도 나를 (비) 웃으며 쳐다보지 않았었니??

난 갑작스럽게 내 블로그를 찾아온 그녀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방긋거림에 응해줬고 그 후부터 그녀는 내게 갑자기 친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언니! 오늘 애들 하교하면 저희 커피 한잔해요!”

“아. 응 그러자~.”

그녀의 갑작스러운 접근이 얼떨떨했지만 인싸인 그녀가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게 오묘하게도 싫지 않았다. 왠지 내가 인정을 받은 것 같았고 나도 그녀의 무리에 낄 수 있을 것만 같은 야릇한 감정이 나를 감쌌다.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서 하교를 했고 그녀는 인싸답게 웬만한 아이들과 다 인사를 나누었다. 둘이 마시기로 했던 커피약속은 범위가 넓어졌고 어느새 5-6명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함께 모이게 됐다. 유치원 1층 커피숍으로 단체로 내려오게 되었고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설레어서도 기뻐서도 아니었다. 커피값 때문이었다. 아이들 포함 10명 남짓된 인원수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엄마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겉모습으로 따지면 내가 제일 어려 보이는 것 같았지만(정말이다 넘어가자) 엄마들의 실제 나이를 알고 있는 나로선 불안감이 자꾸 엄습해 왔다. 누군가 센스 있게 더치페이를 외쳐주리라 기대하며 주문대 앞에 섰다. 그때였다. 골수녀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내게 다가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머 너 설마 더치페이 외쳐주려고?

“언니! 전 아이스 카페라테요!”

그랬다. 골수녀는 더치페이가 아닌 카페라테를 사랑스럽게 외쳤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엄마들도 아메리카노와 산딸기 프라푸치노 등등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런 씨알. 니들 지금 제정신이니.

골수녀의 주문으로 인해 난 커피값 독박을 쓰게 되었고 눈치 있는 어떤 엄마가 뒤늦게 커피값을 정산하자고 나서주었지만 이미 주문과 결제가 끝난 상황에서 돈을 나눠 받기도 치사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짜증이 배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 올라왔다. 골수녀가 돈을 잘 안 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남일에 관심이 없던 난 그때 그냥 흘려들었었다. 그 결과 그녀는 자기 커피값뿐 아니라 줄줄이 알사탕처럼 다른 엄마들의 커피값까지 내게 가볍게 물어다 주었다. 골수녀의 얄미운 행동에도 화가 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낼 수밖에 없었던 내 초라한 모습에도 화가 났다. 그날 밤 맥주를 잘근잘근 씹어먹다가 블로그를 열고 글을 썼다.     



아이를 좀 늦게 낳았다. 늦게 낳은 지도 몰랐다.

그런데 낳고 키우다 보니 주변에 엄마들보다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엄마들과 첫인사를 하고, 커피 한잔을 하고, 밥을 먹고, 키카를 가고, 저녁도 먹게 된다.

무언의 소리가 들린다.

언니니까. 

언니가 먼저 내겠지. 

이 언니만 프런트에, 계산대에 남겨진다. 

이 언니의 카드는 자꾸 들락날락하고 남편이 눈에 아른거린다.

나 역시 외벌인데. 나 역시 경단녀인데.

지금 이곳은 회사이고 저기 나보다 조금 어린 엄마들은 그럼 갓 들어온 신입사원인 것인가. 그래서 날 보며 저는 카페라테요라고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냥 동네엄마잖아요. 월급 많은 상사가 아닌. 

우리는 성인이잖아요. 자신이 먹은 건 자신이 낼 수 있는 그 정도의 능력과 예의가 있는.      

커피 한잔에 내 그릇이 작아지는 날에는 왜 그리 마음이 속상한지. 

그 이유는 아마도 나보다 조금 어린 그 엄마가 아마도 나를

수없이 많이 스쳐 지나간 카페라테 언니 중에 하나로 대해서일 것이다.

길고 힘든 육아의 시간 동안 남편보다 내 마음을 이해해 주고 위안을 나누는 그런 상대가 아닌, 나는 그냥 101번째 카페라테 언니라는 생각에 불편하고 속이 상한다.     

이 언니가 좀 있어 보여서 프런트에 세워둔 것이라면 그건 잘 생각한 게 맞아. 

이 언니가 좀 마음이 있어서. 내 뒤에 서있는 너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래서 프런트에 서있을 수 있는 건 그건 맞아.

그러니 카페라테 101번째 언니에게 너도 만약에 진하게 아메리카노 한잔 쏠 수 있게 된다면 그땐 이 언니가 너에게 시원한 카스 한 짝 날려줄게.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난 후 조금은 시원해진 마음으로 남은 맥주를 들이켠 후 잠이 들었고 내가 쓴 이 포스팅엔 많은 댓글들이 달렸다. 그중 골수녀도 비밀글로 댓글을 달아놓았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있었다. 이 얘기 내 얘기 아니냐고. 응 맞아 니 얘기야. 내 얘기가 아니냐고 묻는 걸 보니 너 다 알고 하는 행동이었구나. 이런 앙큼 쟁이 같으니. 골수녀는 나름의 변명들을 써놓았다. 남편이 쓸데없는 곳에 돈 좀 쓰지 말라고 해서 본인도 피곤하다고. 그녀는 은근히 당당했고 뭘 이런 글을 써놓았냐는 듯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인별그램 속 그녀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간쓸개 내놓고 사는듯한 남편이 커피 한잔도 사 마시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었고 그녀가 쓰지 못하는 돈을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빌어서 쓰는 건 괜찮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골수녀의 삶의 패턴은 좀 독특했다. 그녀는 일주일의 5일을 동네 엄마집을 돌아다니며 보내고 있었다. 집으로 놀러 가서 애들은 풀어헤쳐놓고 저녁까지 잘 접대받으며 인별그램에 올릴 사진을 실컷 찍은 후 밝게 웃으며 다음집을 다니는 게 그녀의 일상이었다. 인싸라는 심리를 이용해 득이 없는 곳에는 가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이거나 얻을 게 있는 곳에만 주로 다녔다. 난 점차 그녀가 얄미워졌고 그녀는 이런 내게 겉으로는 활짝 웃으며 대했지만 속으로는 남모를 감정을 서로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그땐 몰랐다. 골수녀의 뒤끝이 얼마나 길고 지독하고 치사한지. 그녀와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