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친하게 지내는 H가 있었다. 나이가 나보다 어리긴 하지만 사실상 절친과 다름이 없는 사이다. 결혼 전부터 어떤 계기로 인해서 알게 되었고 각자 결혼 후 내 아이와 한 살 터울로 딸을 낳게 되면서 육아동지로서도 서로 많이 의지하고 지내고 있다. 사는 곳도 어쩌다 보니 내가 거주 중인 집 근처로 H가 이사를 오게 되면서 왕래가 더 잦아졌다. H는 가정적인 친구로 집을 꾸미고 살림을 하는데 재주가 있었고 그에 어울리게 예쁜 3층집 주택에 거주 중이다. 주택의 특성상 아이들이 놀기도 좋고 사진도 잘 나오곤 해서 블로그에 H와의 만남 포스팅을 종종 올리곤 했다.
하루는 하원 때 만난 골수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언니! 잘 지내셨죠. 방긋방긋. 어제 언니 블로그 봤는데 조회수 엄청 높더라고요! 그.. 언니 친구분 집 사진이 너무 이쁘던데! 이 근처 예뻐주택 맞죠?”
“응? 아 거기 맞어. 우리 포뇽이랑 H딸이랑 친해서 어제 놀러 갔다가 찍은 사진들이야”
“어머~!! 언니 너무 좋으시겠다. 저도 그 주택 한번 구경가보고 싶었는데. 언니 혹시 시간 되실 때 저 그 H언니 소개시켜 주시면 안될까용? 제가 커피 한잔 살게요!!”
“(네가 커피를? 카페라테로??) 으응 그래. 다음에 시간 될 때 같이 한번 보자”
“우아. 언니 고마워요! 전 시간 많으니까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방긋방긋”
골수녀는 H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난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로 흘려들었다. 그러나 그 후 골수녀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H의 안부를 물었고 난 결국 H와 커피 한잔 하기로 한날 골수녀도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어찌나 발랄하게 사근거리던지. 그녀의 눈빛엔 하트가 넘실거렸고 H가 무슨 말만 해도 까르르 거리며 물개처럼 박수를 쳐댔다. 저게 돌았.. 아니 쟤가 왜 저러나 싶었지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따로 있을까 싶어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지나 보니 사람을 좋아하는데 따로 이유를 가진 사람도 있다는 걸 지금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골수녀의 인별그램에 아주 어여쁜 사진들이 게시되었다. 배경이 왜 이리 낯이 익던지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곳은 H의 집이었다.
‘나만의 절친 H언니의 예뻐 주택! 언니의 초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저녁도 잘 먹고 우리 라테도 너무너무 잘 놀았어요! 올여름은 예뻐 주택에서! 방긋방긋!
#예뻐주택 #H언니사랑해요 #소중한우리언니 #이번주말도GOGO'
헐. 골수녀는 어느새 H와 ‘나만의’ 절친이 되어있었다. 사진은 또 어찌나 찰지게 이쁘게도 찍어왔던지. 난 묘한 서운함과 배신감까지도 들었다. 밝게 웃고 있는 골수녀의 모습도,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배경으로 보이는 H의 잘 정돈된 집까지 나를 보고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H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었고 내게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 그저 내게 말을 하지 않고 둘이 만남을 가진 것뿐이었다. 그런 것뿐인데 나도 알고 있는데!! 알고 있다고!!! 그런데도 난 눈가가 바들바들 떨렸고 뱃속이 꿈틀거렸고 혼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속얘기를 H에게만 하고 지냈던 나로서는 갑자기 소중한 누군가를 뺏겨버린 것 같았다. H를 믿지 못해서는 아니었지만 이런 일로 서운하다고 나보다 어린 동생에게 말을 꺼낸다는 게 왠지 속좁고 치사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골수녀 그 기지배.. 부르르.. 왜 이리 야곰야곰 내 속을 긁는 짓만 하는지 방긋거리는 그 여자의 얼굴에 대놓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막상 물어볼 말도 마땅치 않았다. ‘너 H한테 접근하면 죽인다.’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 여자는 ‘언니가 소개해 주셨잖아요 방긋방긋’ 이럴게 뻔했기에 내 속만 이글이글 탈 뿐이었다.
속만 태우던 난 며칠 후 하원 때 골수녀를 마주쳤다. 씨익 웃으면서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언니! 저 얼마 전에 H언니 집에 초대받아서 갔었는데 들으셨죠?”
“아. 아니 인별그램에서 보긴 했어.”
“어머 못 들으셨구나. 언니도 불러서 같이 갈걸 그랬나 봐요 방긋. 그런데 언니 저..”
“왜? 무슨 할 말 있어?”
“에이 아니에요. 제가 괜히 말 전하는 것 같고..”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언니가 정 궁금하다 하시니까 그럼 얘기해 드릴게요. H언니께서 언니한테 좀 서운한 게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서운한 거? 어떤 게?”
“아니. H언니 집이 주택이라 애들 놀기가 좋긴 하지만 너무 H언니 집으로만 매번 놀러 가신다면서요~ 아휴. H언니가 아무리 언니랑 친해도 그렇게 자주 가시면 H언니도 좀 힘드시죠~”
“...H가.. 그랬어?”
“너무 신경 쓰진 마세요~ 언니가 너무 모르시는 것 같아서 살짝 알려드리는 거예요 방긋방긋”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H가 주택으로 이사 온 후 우린 H의 집에서 만남을 자주 갖긴 했다. 그러나 그건 마당과 수영장을 이용할 수 있는 여름에 주로 갔었던 것이고 겨울엔 대부분 우리 집에서 만남을 갖곤 했다. 나는 성격상 남에게 피해를 주는걸 극도로 싫어하는 편이라 아무리 H와 친한 사이여도 사소한 것 하나라도 중립을 지키려고 신경을 많이 쓰곤 했다. H의 집에서 만남을 가지는 날에도 내 아이가 먹은 것이나 어질러 놓은 것들은 다 치우고 나왔고 점심이나 저녁을 먹게 될 때면 H가 신경 쓰지 않도록 대부분 내가 음식을 사 오거나 배달을 시켜서 먹곤 했다. 나름의 서로를 위한 무언의 배려였고 H도 그 부분에 대해선 다른 생각을 가지진 않을 것이라 생각해 왔다. 제일 마음 터놓고 지내는 H가 골수녀에게 그런 속얘기들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람마음이란 게 참으로 좁고 이상해서 믿을 수 없으면서도 서운했다. 인별그램에 올라온 사진부터 오늘 들은 골수녀의 말까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확인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괜히 쉽사리 말을 꺼냈다가 H와의 관계가 틀어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단기적으로는 불만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특히 분노나 갈등을 피하고 싶을 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것은 나쁜 전략이다. 부정적인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당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피상적이고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자 샌드 《센서티브》
두려운 마음 때문에 어떤 오해일지도 모르는 오해를 품은 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나는 확인해야만 했다. 설령 이 모든 게 골수녀의 말대로 사실일지라도 H와 얘기를 나눠야 했다. H에게 연락을 해서 아이 등원 후 커피 한잔을 했다. H는 평상시와 똑같았고 나는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스러워 머리와 입이 따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H가 밝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언니 얼마 전에 골수녀가 갑자기 우리 집에 왔었잖아~”
“아 그거 골수녀 인별그램에서 봤어. 너희 집에서 같이 놀았다고 사진 올렸더라고”
“그랬구나. 난 인별그램을 안 해서 사진 올린 지도 몰랐네. 그날 집에 있는데 갑자기 그 언니한테 연락이 오더니 내 생각나서 샀다고 조각케이크를 준다고 들린다는 거야.”
“으응? 초대해서 온 게 아니고?”
“응 친하지도 않은데 초대는 무슨~ 갑자기 집 앞에 왔길래 어떻게 해야 하다가 집에 잠시 들어오겠냐고 물었더니 바로 오케이 하더라고. 그래서 갑자기 만나게 됐어.”
“아~~~ 그으으랬구나아아아. (초대받았다더니!!)”
“아이까지 데리고 왔길래 나도 정신이 없어서 언니한테 연락도 못했었어.”
“괜찮아. 괜찮아~ 그래서 잘 놀고 갔어?”
“응 그런데 그 언니가 이상한 얘기를 하더라고. 포비언니가 자주 우리 집에 와서 좀 피곤하겠다고 하는 거야”
“헐 (이..이 망할뇬!!)”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언니와의 사적인 관계까지 얘기를 하는 것 같길래 그냥 웃으면서 얼버무리고 지나갔거든. 그 언니 좀 부담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아.”
맞어!! 네 말이 다 맞아!!! 골수녀는 부담덩어리에 이간질 덩어리야!!! 난 아무것도 모르는 H를 오해한 게 너무 미안했고 골수녀를 잡아다 경을 치고 싶었다. H에게 더 이상 긴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 여자의 말장난에 놀아나서 며칠을 고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내가 한심했고 분노로 속이 드글드글 끓어올랐다. 골수녀는 굉장히 지능적인 말솜씨로 따져 묻기에도 애매하게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방긋거리는 그녀의 입을 잘근잘근 오려주고 싶었지만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속으론 복수를 꿈꾸었다. 기필코 복수를 하고 말리다. 40넘은 포비언니는 인간관계 최상위 레벨이라는 엄마들의 인간관계에 이렇게 한발 더 깊숙이 발을 디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