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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Nov 24. 2023

아줌마의 어떤 알바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집에 있으면 원래 세수 안 하는 거 아냐?” 재택근무 중에도 세수할 틈이 없다는 나의 푸념에 앞에 앉은 한 친구가 대꾸하자 그 옆에 앉은 다른 친구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셋은 빵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도 집안에서 뛰어다니다가 이 글을 해치우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아니, 아침부터 책상에는 앉아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하루 종일 뛰어다닌 느낌이다.




글쓰기 커뮤니티를 통해 매일 하나씩 글을 쓰는 공동 미션을 수행 중이다. 오늘의 주제는 ‘폰 사진첩에 있는 사진 한 장을 선택해 글쓰기’이다. 사진첩을 보는데… 어이쿠, 그 사진첩은 그냥 나였다. 블로그에 그때그때 북리뷰를 올리지 못하고 못하고 대신 일단 급하게 찍은 책 표지와 몇몇 페이지, 오늘 아침 밀린 회사 일을 하다가 갑자기 허기진 느낌에 위안을 얻고 싶어서 다급하게 읽은 책 속 인상 깊은 글귀, SNS에 올릴 용도로 찍은 사진 몇 장, 그렇게 그 사진을 찍은 이의 상태처럼 카테고리가 마구 섞여있는 사진들. 그리고 쇼핑몰 상품 사진 2000여 장.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소멸할까 봐, 그렇게 보석 같은 뭔가가 날아가 버릴까 봐, 나의 영감이, 글의 소재가 사라질까 봐 자꾸자꾸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찍은 사진은 쌓이고 방치되고 감당 못 할 지경이 되어 외면당한다. 누구에게? 나에게. 그리고 어느 날 통 편집 아닌 통 날림을 당한다. 누구한테? 나한테.




쇼핑몰 사진 2000장은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약 7, 8년 전, 그때도 나는 얕은 지식으로 여기저기에 훈수 두는 것을 좋아했는데, 쇼핑몰 온라인 팀에 근무하는 동네 엄마의 눈에 띄어 우리 동네 쇼핑몰에서 상품의 사진을 찍고 사이트에 업로드를 하는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엄마에 따르면, ‘사진은 회사일 하면서 남는 시간에 와서 찍으면 되고, 상품 설명도 간단하게 써서 올리면 되는, 아주 쉽고 편하게 일하며 돈도 버는’ 그런 일이었다.




20대 내내 과외만 했던 나는 뒤늦게 왠지 인생 경험을 좀 해보는 것도 같고, 조금 새로울 것도 같고, 솔직히 꿀알바인 것 같아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애증의 쇼핑몰 찍사 알바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 브랜드는 조O너스였다. 아니 조O너스가 아직도 있어?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오프라인 매장에서만 한 달에 2억의 매출을 올려 팡파르 방송이 울려 퍼지게 만드는 여성복 층의 탑 브랜드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매장에 찾아간 첫날, 나는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아무도 내 이름을 묻지 않아서 당황했다. 제대로 나에게 인사해주지 않아서 또 당황했다. 나는 그저 사진 찍으러 온 아줌마였다. 왔으면 잽싸게 마네킨에 옷을 입히고 벗기고, 손님들 동선에 방해되지 않게 움직이고, 옆 매장과 앞 매장의 따가운 시선을 덜 받으려면 후딱 사진을 찍고 빠져야 했다. 그렇게 있으되 없어야 할 존재였다. 매니저는 온라인 팀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온라인 판매를 시작하긴 하는데 오프라인도 바빠 죽겠는데 무슨 사진을 찍냐고 영 탐탁지 않아 했다. 쉬는 시간은 없었다. ‘우리 제품 잘 찍어주세요. 잘 부탁해요~’라는 반응을 생각했던 나는 그 나이까지 뭣도 모르는 이였다. 지금껏 나는 늘 뭔가로 불렸다. 대학 졸업 후 맨 처음은 연구원님이었고, 주임, 선임, 팀장, 실장, 부장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처음 사람을 만나도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 모든 것에 나는 상당히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다. 아 물론 맘속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틈틈이 알바를 이어갔다. 1층 잡화, 구두, 선글라스, 가방, 2층 남성복, 수영복, 스포츠웨어, 3층 여성복, 4층 아동복까지. 그동안 아주 드물게 ‘**씨’ 혹은 ‘담당님’으로 불렸다. 보통은 호칭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저기요’라고 부르기에는 그들도 조금 애매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커피를 주는 매장도 있었고, 아주 드물게는 촬영할 옷에 스팀 쫙 먹여 행거에 착착 걸어놓은 곳도 있었다. 점심 먹고 올 테니 손님 좀 보라는 매장과 창고에 가서 촬영할 옷을 알아서 골라오라는 매장은 관두었다. 아르바이트비를 3개월이 지난 후에 주는 매장도 있었다. 손님이 있으면 찍지 말라고 해서 하염없이 서서 기다리게 만드는 곳도, 매장 오픈 전인 아침 9시 전에, 혹은 매장 종료 시간인 밤 10시 이후에 오라고 해서 자정 넘어서까지 찍은 곳도 있었다.




하나의 상품을 찍고 업로드하는데 1시간쯤 걸린다는 전제로 아르바이트비는 상품당 7000원이다. 그 가격을 정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격만은 8년째 불변이다. 사진을 찍고, 집에 와서 수정하고, 까다로운 기준에 맞춰서 웹사이트에 업로드를 한다. 상품 코드를 여러 번 확인하고, 할인가를 적용하고, 나 스스로 상품 설명도 작성해야 한다. 내가 이 일을 시작했던 가장 큰 이유는 ‘머리 쓸 일이 없으니 편할 것 같아서’였다. 회사생활을 오래 했지만 나는 여전히 높은 정확도를 요하는 일에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이 일이 그랬다. 정해진 시간에 한 번에 집중해서 촬영을 해야 한다. 촬영 기준에 맞지 않거나 빼먹은 컷을 재촬영하러 가는 일은 나에게도 매장에도 몹시 성가신 일이었다. 상품 가에서 마지막 자리를 빼먹고 업로드하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알바 기간만 되면 나는 식구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다.




몇 시간을 서서 촬영을 하다 보면 엉치가 빠질 것 같고 집에 오는 길에는 다시는 안 한다고 이를 갈았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비를 현금으로 받는 그 재미에, 알바는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따로 빼놓으리라 매번 다짐했지만 어김없이 카드 값의 일부로 사라졌다). 남편은 내가 그렇게 증오하면서도 알바를 이어가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가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내주어야 하는데 내가 고용인의 눈만 높여주고 시장의  흐름을 흐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사진 수정을 도와달라고 하면 묵묵히 해주었다. 뭐 돈 번다는데.




이번 달 초, 몇 달 전 석 달가량 사진을 찍었던 매장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왔다. 못 한다고 하면 될 것을, 거절에 취약한 나는 망설이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달 초 그에게서 장편의 메시지가 왔다. 1층 명품관 전체를 맡게 되었는데 같이 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는 에너지가 많고 센스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간청한 것도 아니었다. 돈을 더 주겠다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일주일에 딱 한 번만 촬영 가능하다는 소심한 전제를 이야기하며 알바를 재개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명품 관에는 자체 창고가 있었고 매니저는 상품을 끝도 없이 내왔다. 일주일에 한 번만 촬영 가능하다고 했는데 매니저는 그것을 하루종일로 이해한 듯했다. 시간당 7000원. 시간싸움이었다. 짧은 시간에 빨리 찍는 것이 관건이었다. 며칠 전 읽은 <깻잎 투쟁기>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주노동자들의 삶.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만 오천 장 깻잎 따기. ‘어따 대고 비교를.’ 고개를 저었다. 고가의 상품들이라 사진도 잘 찍고 컷 수도 많아야 하며 멘트도 잘 적어주어야 한다고 온라인 팀장은 덧붙였다. 그렇게 내 사진첩에는 엊그제 찍고 아직 수정전인 수많은 사진이 있다.


한편 나는 전혀 몰랐던 매장에서의 삶을 조금 가늠해 볼 수 있었다. 겨우 곁다리 경험으로 뭘 알게 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우습지만 조금 나열해 본다. 매장을 여유롭게 지키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알바 분이며 실제 매니저는 창고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매장은 좁고 상품은 넘쳐난다. 본사에서는 매일 신제품을 보내온다. 새로 온 제품을 꺼내 정리하고, 판매가 뜸하거나 본사로 복귀해야 할 물건, 타 지점으로 보내야 할 물건들은 포장해서 택배로 보낸다. 박스 까고 박스 포장하고. 하루 종일. 그 와중에 매출 압박, 진상 고객 응대. 그렇게 창문 없는 쇼핑몰에서의 365일. 하루 한 끼 식사.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알바 쓸 여력이 없다면 그나마 매니저 혼자서. 1, 2년에 한 번씩 창고에서 쓰러져 있는 동료가 발견된다. 만일 살아남았다면 그는 세네카처럼 인생을 깨닫고 쇼핑몰을 박차고 나와 자신의 삶을 찾으러 떠날까? 일주일간 의식불명이었던 옆 매장 매니저가 오늘 출근한 걸 봤다는 매니저의 말은 꽤 충격이었다. 수능 날, 자신의 딸은 시험을 망쳐 재수를 결정하고 웅크리고 있을 그 시간, 매니저는 시험을 잘 봐 딸내미와 쇼핑하러 나온 가족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며 신상 제품에 대해 열띠게 설명하고 있었다. 손님이 간 후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까, 아니면 그 또한 사치일까. 그녀는 울고 있는 내 아이에게 뛰어갈 수 없다. 대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직 네 시간을 더 서서 버텨야 한다. 미소를 유지하면서.




온라인 판매에 신경을 쓰면 자면서도 돈이 벌릴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매니저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매장일 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삶이다. 온라인 문의 글에 바로 댓글을 달지 않으면 네이버로부터 판매자에게 페널티가 주어진다. 어차피 소비자는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전국 최저가 매장에서 주문한다. 그나마 색상이, 디자인이 사진과 다르다고 환불한다. 매장에서는 온라인에 신경 쓸 틈이 없다.




매장 사람들은 퉁명스러운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겨우 몇 시간 사진을 찍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온다. 뒤에서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매장 매니저가 손님을 맞고 있다. 경이롭다. 나는 매장 안의 가방을 다 불살라 버리고 싶다. 서 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된 후로 스타벅스의 직원들에게 상냥하게 인사한다. 지나쳤을 때는 몰랐던 1층 매장이 겨울에 얼마나 추운지 알게 된 후에는 1층에 들어올 때 재빠르게 문을 닫는다. 일단 사고 반품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손님들 때문에 세일 행사 종료 후 반품 율이 5분의 1이나 된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더 주의 깊게 물건을 고른다. 우리 회사 바로 맞은편에는 고용노동청 본사가 있어 시위가 잦다. '서비스직의 월 x회 휴일을 보장하라'는 문구가 그렇게 새로워 보일 수 없었다. 이 일을 하고 나서부터 나는 내 주변에 서비스직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 나 같은 사무직인줄 알았다. 아니,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몸으로 움직이고 있는 그들이 없다면 나는 그 어떤 순간도 혼자 무엇을 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위해 뭔가 액션을 취하는 건 결코 아닌데 나는 그렇게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래서 그런 서비스직을 하면 안 돼’라는 최악의 논리로 흐르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있다. '버릴 경험이 없다.' 나는 평소 내가 하지 못할 경험을 했다. 나에게는 경험이지만 그들에게는 어제였고 오늘이자 내일이고 어쩌면 영원이다. 오늘 아침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코로나 때 대출 규제를 마구 푼 결과가 지금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 4년을 겪으면서 자영업자들의 재정상황과 가정 경제가 무너지고 이자율이 높아지면서 그나마 이제는 대출을 대출로 막던 방식도 어렵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대 대부업체인 러시 앤 캐시도 사업 철수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대부업체로부터도 돈을 꿀 수 없는 벼랑에 몰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코로나 때 내내 재택근무를 하며 우리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고, 지금은 이렇게 편안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인 걸까?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까. 오늘은 정말 빨리 마무리하려고 했다. 사진첩에 있는 사진을 업로드해야 한다.




어쨌든 사진 찍는 일은 진짜 관두어야 한다. 이 알바는 나를 급속도로 소진시킨다. 금액이, 판매량이, 외모가, 물질이 중요한 쇼핑몰에 갈 때마다 나는 내 영혼이 소멸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 봤자 겨우 천 조각 혹은 소가죽인 손바닥만 한 가방이 즐비한 매장과 그것을 수백만 원씩 내며 척척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적으로 의기소침해진다. 나와 내 아이들이 아니라, 70세에도 오직 생계를 위해 일하고 있는 친정엄마가 떠올라 순간순간 슬퍼진다.




“멈춰 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 좋겠어요. 지금 무엇과 가장 절실하게 연결되기를 원하는지를 먼저 파악하세요. 그다음에는 안간힘을 써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실천하는 거죠. 만약 답이 확실하다면 언젠가는 될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죠.”


요즘 내가 자주 인용하는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으나...




나는 그네들의 고달픈 삶을 겨우 조금 엿보았다. 매장을 지키고 있는 자들은 알바도 주인도 거의 다 중년의 여성들이다. 알바를 그만두더라도 그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뭔가 나 외의 사람들과 연계해야 하지 않을까. 들여다보고 알아가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꼭 나와 취향이 같은 커뮤니티여야 할까. 커뮤니티와 공동체는 같을까 다를까. 나는 지금 이렇게 자기 성찰인양 편안하게 떠들고 있다.





생각이 얄팍하여 나아가질 못한다. 알바를 하면서 가장 큰 깨달음은 나는 참 남을 모른다는 것이다. 모른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올 5월에 썼던 글입니다.

수박 겉핧듯이 한 경험을 가지고 구구절절 말이 많았던 게 아닌지 조심스럽습니다.

부디 특정 직종을 가벼이 보는 글로 비치지 않길 바랍니다.

여러 번 읽고 검수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저의 글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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