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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Nov 23. 2023

죽음 앞에 참 말이 많다

온라인 글방에서 매일 글쓰기를 함께 합니다. 

주어진 주제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오늘의 주제] 

소크라테스는 억울한 재판이지만 그 재판을 받고 죽기 전, 제자들과 토론을 했다고 한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늘의 글 주제를 확인했을 때 나는 자이언티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엄마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식탁에 앉아 거실에 햇살이 차오르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상에서 막연한 불안한 감정이 있었던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그럴 때마다 아이들 생각에 슬픔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저 어린것들을 두고…’ 감상에 취할 틈도 없이 ‘애들은 어떻게 하지?’ ‘재혼은 안 되는데. **이가 워낙 예민해서. 남편이 아이들이 큰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남편이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을까?’ ‘결국 양쪽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식이 되려나? 결국 우리 엄마한테 맡겨지는 식이 되려나? 아, 우리 엄마…’ 그러다가 결국은 좋은 분이 우리 아이들에게 와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이 귀결되곤 했다. 아들 둘 딸린 남자를 어떤 여자가 받아주려나 싶으면서도. 




지금은? 그때처럼 상상만으로 가슴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마음이 묵직해지는 한편 담담해진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수많은 목숨이 한순간 홀연히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 많이도 보았다. 




친구의 아버님은 최근 자신이 암에 걸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자신이 인생을 살만큼 살았고 치료를 받다 고통스럽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치료를 받지 않고 남은 시간을 차분하게 마무리하고 싶다고 하셨다. 친구와 그 가족은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또 한 친구는 언젠가 존엄사가 합법인 스위스로 가기 위한 돈을 마련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 주어 나를 놀라게 했다. 결국 병으로 고통스럽게 말년을 맞이할 확률이 큰데 그렇게 큰 고통에 휩싸여 인생을 마무리하기 싫고 그 모습을 가족에게 트라우마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폐암 말기 아버지의 마지막 일주일 간의 지옥 같은 고통을 목도한 아들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3년간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남아 계신 어머니는 절대 그렇게 보내드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영상은 나에게도 큰 울림이 되었다. 




이어령 어르신처럼 죽기 전 몇 년 동안 차분히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사색하며 주변에도 귀감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죽음은 영적이며 동시에 현실적이다. 마지막 날에도 양말 짝을 맞추느라 정신없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니 웃퍼진다. 엄마란 존재는 죽음 앞에서도 분주하다. “야들아, 된장찌개 끓여놨으니까 나 죽으면 이따 저녁에 데워 먹거라. 아 참! 냉장고에 나물 무친 것도 오늘까지 먹어 치워야 된다잉?” (젠장!) 




정리 멘토이자 <잘 되는 집들의 비밀>의 저자 정희숙은 죽기 전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집을 정리한다는 것을 언급했다. 다시 말해, 죽을 때가 되어서야 정리를 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오늘의 글 주제를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때는 집이 정리가 되어있다는 전제일까?’라는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죽기 전 마지막 날 내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대학교 졸업 후 20년 넘게 정신없이 살아왔고 마지막 날까지도 헐레벌떡 하루를 보내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싫다. 우리 집은 미리 정리가 싹 되었으면 좋겠다. 죽기 전 ‘이걸 언제 다 치워…’라고 골머리를 앓기는 싫다. 청소 도우미 분의 도움을 받아 말끔히 정리하고 깔끔하고 좋은 향기만 나는 편안한 우리 집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은’ 불편한 집이 아니라 평안하고 온전한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지인들과는 그전 주에 벌써 몇 차례 소소하고 다정한 죽음 자축 파티를 열어 울고 웃으면서 다 풀었다. 장기 기증서에 다 서명했고, 가지고 있는 돈이랄 것도 없지만 남편과 상의하여 평소 마음이 갔던 단체에 기부도 마칠 것이다. 


많은 엄마들이 생의 마지막 날 가족들과 음식을 해서 함께 먹겠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역시나 나도 그 생각을 떠올렸다. 여자라는 존재가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남자에게 마지막 날을 상상해 보라고 하면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되면서도, 나 또한 내가 만든 음식을 가족들과 함께 먹는 장면을 상상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탄천을 잠깐 걷고, 가볍게 아침을 먹고 남편이 내려주는 진한 라떼를 한잔 마신 후, 좋아하는 책의 구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점심은 좋아하는 빵을 곁들여 사 먹고, 아이들과 산책을 나가서 햇살을 맞으며 걷고, 아이들이 축구하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겠다. 저녁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매콤한 된장찌개와 함박스테이크, 남편이 좋아하는 샐러드를 올려 가족들과 밥을 먹겠다. 사랑한다고, 미안했고, 고맙다고 이야기해 주고, 오랫동안 안아주겠다. 그리고… 죽겠다. 

(전제된 사망 시점은 현재인데, 그렇게 상상한다면 부모님과는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 도무지 너무 먹먹해져서 언급하지 못하겠다.)   




이렇게 착착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오늘의 주제는 사실 말이 안 된다. 그 누구도 자신의 마지막 날을 예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와 같은 현실적 ‘선고’를 할 수 있는 의사라면 모를까.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는 환자로써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짙은 병색으로 인해 가족들에 대한 미련은 깡그리 잊은 지 오래이고 삶 자체가 지긋지긋해져서 ‘이제 제발 죽었으면’하는 생각에만 휩싸여 있을 수도 있다. 그나마 정신이 온전하다면 말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날 집에서 내리는 은은한 향의 커피나, 사뿐사뿐한 산책이나, 내가 직접 만든 따듯한 저녁상은 사실상 상상에만 머물 확률이 매우 매우 높다. 그러니까 이런 상상도 죽음을 문턱에 두지 않았기에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뭐다? 오늘을 잘 살자. 내 가족을 미친 듯이 사랑하자. 필요 없는 것에 시간을 쓰지 말자.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정리는 지금 하고, 기부도 지금 하자. 




내가 죽으면? 남겨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겠지. 그들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환생을 원하지 않는다.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솔직히 나는 오늘의 주제에 한해서라도 촉촉하고 은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끌림>의 이병률 작가처럼 산문인데 시 같은 글을 쓰고 싶었다. 주제가 죽음 아니던가. 그런데 오늘도 나의 시선은 현실에 머물렀고, 상상 파괴자의 자아가 생각을 압도했다. 어쩌랴. 할 수 없지. 내 생각이 그렇게 생긴 것을. 그렇게 죽음이란 주제 앞에 내 생각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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