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보시다시피 참 뷰리플 한 날씨네요. 아이슬란드에는 두 가지 계절이 있는데요, ‘겨울’과 ‘실망,’ 그리고 오늘은 ‘실망’이네요. 그러니 좀 참아주실래요?” 버스 투어를 떠나는 아침, 마이크를 잡은 가이드 루카스의 유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재미있는 아저씨네. 어두운 하늘에는 굵은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다.
아이슬란드에 닷새째 머물면서 비 온 날은 이틀째. 이곳 날씨가 워낙 변덕스럽다고 들어서일까? 오늘 관광은 망했구나,라는 느낌은 없다. 어떻게 되겠지 뭐. 오히려 스산해서 더 아이슬란드 분위기가 나겠네. 혼자 하는 여행이라 그런지 한결 마음이 편했다.
배낭여행만으로는 여러 명소를 가기 힘들 것 같아서, 본격적인 여행 전 가볍게 버스 투어를 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골든서클(golden circle)은 아이슬란드의 대표적인 관광 코스로, 꼭 가봐야 할 세 가지 명소를 포함한다. 황금폭포라는 뜻의 굴포스(Gullfoss), 거대한 분화구인 케리드(Kerið) 그리고 게이시르 간헐천(geysers of Haukadalur)과 싱베틀리르 국립공원(Þingvellir National Park)을 둘러보는 코스이다. 이곳의 물가를 생각했을 때 10만 원 정도의 합리적인 가격으로 서부의 주요 명소를 둘러볼 수 있는 것이다. 단, 가이드의 설명이 영어로만 제공되기 때문에 열심히 귀 기울여야 한다.
아침 8시 반까지 집합하라더니 버스에 탑승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관광객을 일일이 호명해 탑승객을 확인하고, 대형 버스에 올랐다가 목적지에 따라 재배치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결국 출발은 10시가 훌쩍 넘었다. 그러나 인솔자도, 관광객들도 표정이 편안하다. 유럽인들의 여유로움일까? 나도 그러려니를 해 본다.
인솔자는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이름을 부르느라 애를 먹었다. 내 이름이 언제 불릴까 그의 주변에 겹겹이 둘러서서 귀를 쫑긋하고 있던 우리는 그가 누군가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해 보려고 몇 번이나 용을 쓰다가 결국 실패하자 단체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나니 왠지 서로가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나라에서 왔구나 싶어 신기했고, 우리 모두가 똑같은 여행객이라는 일종의 동질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참 좁게도 살았구나 싶어 조그맣게 한숨도 새어 나왔다. 역시나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버스가 출발하고 도착지까지 가는 동안 아이슬란드에 대한 루카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이슬란드의 역사, 지형, 화산, 날씨, 경제와 사람들까지 모든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반 정도 알아들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지열로 인한 재생에너지를 사용해 전기세가 거의 무료에 가깝다. 새로운 산업을 시작할 때는 친환경 개발이 원칙이다. 2030년부터는 전기 차만 생산될 예정이다.
아일랜드 출신인 루카스가 현 아이슬란드 대통령과 가진 커피 타임에 대해 얘기할 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아이슬란드인 친구가 여기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면서 대통령과도 만날 수 있다길래,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전화번호부에 나온 연락처로 연락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화를 했죠. 대통령 비서가 용건이 뭐냐고 묻길래, 대통령과 차 한잔하고 싶다고 했어요.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일정을 잡아 주더군요. 그날 아침, 뭐 입고 가지?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나는 영부인 엘리자 리드의 광팬이다. 아이슬란드의 용감한 여성들에 대해 쓴 그녀의 책에 큰 감명을 받은 나는 실은 이 여행 중에 혹시 그녀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계시인가. 루카스는 전직 레이캬비크 시장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번에는 전 시장한테 전화를 해 봤죠. 그는 대통령보다 더 바쁜 사람이었는지 몇 주 후에 만날 수 있었죠. 그런데 만남의 조건도 붙더군요. 맥주를 가져오라나 뭐라나. 참 유쾌한 시간을 보냈어요. 그 양반이 이번 6월 1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죠. 내 표는 그 양반 거예요.”
재미있는 이야기에 쏙 빠져있다 보니, 어느새 첫 목적지인 케리드 분화구에 도착했고, 우리에게는 40분간 자유롭게 돌러 볼 시간이 주어졌다. 버스에서 내린 후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녀와 나는 어느새 보폭을 맞추며 함께 걸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브라질 출신으로 아일랜드에서 살고 있는 크리스티안은 세 살, 다섯 살 두 아이의 엄마이자 직장맘이었다. 육아와 직장생활의 번아웃으로 부부 상담을 받던 중,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며칠간 나 홀로 여행을 떠나왔다. 조용하며 깊은 눈매를 가진 그녀와 나는 금세 편안해졌다. 우리는 잔비가 쏟아지는 분화구를 말없이 응시했다.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는 광경을 숨죽여 관찰하고, 바람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거대 폭포 앞에서는 “엄마는 강하다!”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버스가 어느 휴게소에 들렀을 때였다. 휴게소 내의 기프트샵에 전시된 올드카를 본 그녀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 차가 마음에 들었는지를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이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실은 저 차 번호가 아기였을 때 하늘나라로 보낸 큰 아이와 관련이 있어요. 그냥… 그 아이와 관련된 것을 보면 무조건 사진을 찍어요.” 나는 어느 날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아 이별해야 했던 나의 뱃속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남들에게 절대 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아이도 태어났었으면 큰 아이였다.
“늘 같이 있어요. 지금 여기도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크리스티안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같은 아픔에 두 아들 맘이라는 점까지 닮은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가까워졌다.
마지막 코스인 싱벨리어 국립공원은 광활한 대지였다. 우리는 여전히 나란히 붙어서 그저 말없이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혼자 인 듯 혼자가 아닌 그 시간이, 그 동행이 좋았다. 그러다 문득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은 딱 한 시간이었고, 우리는 그제야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을 깨달았다. 허겁지겁 되돌아 뛰기 시작했지만 갈 길이 까마득했다. 집합 시간 10분이 지난 시점, 버스 기사가 뛰어오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일부러 차에 시동을 걸고 실금실금 이동하고 있었다. “Stop! Stop~~~!” 나는 두 손을 휘저으며 유난을 떨었다.
버스에 올라타자 박수갈채와 환호가 터졌다. “죄송해요, 여러분! 제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나 봐요!” 불쑥 나온 그 말은 무의식 중의 진심이었으려나?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아본 운전기사는 소주를 사 오라며 농담을 건넸다. 아이슬란드 펍에서 파는 소주는 한 병에 4만 원에 이른다.
하루 종일 꼭 붙어 다닌 우리는 헤어질 때 깊은 포옹을 나누며 서로의 안녕을 빌었다. 그녀는 더블린에 오면 꼭 연락하라며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슬란드 아래에 있는 아일랜드 친구가 생겼다. 하루 종일 아이슬란드의 최고 관광 명소를 눈에 담았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가이드 루카스의 말, 크리스티안,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나 자신.
“This is meant to be.” 이 만남은 예정된 것이었어. 이것은 운명이야. 헤어지기 전 크리스티안이 나지막이 속삭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그 말을 여행 중 자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마다 슬픔을 간직한 두 아들의 엄마, 직장여성, 그리고 그냥 인간 크리스티안의 행복과 평안을 가만히 빌었다.
* 여행을 마치고 귀국 길에 아이슬란드에서는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 국민의 80.8%가 참가한 이번 투표에서 1~3위가 모두 여성이었고, 할라 토마스도티어는 아이슬란드의 역대 두 번째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기존에 연재를 완료한 '엄마 혼자 버스 타고 아이슬란드'의 수정 버젼입니다.
다시 읽고, 기억을 되새기며 다듬고 있습니다.
회차에 따라 지난 연재와 내용이 동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