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수영장?
아이슬란드 제2의 도시 아퀴레이리. 이 도시의 3대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안내 책자에 언급된 동네 수영장에 나는 또 한 번 의아해졌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큰 수영장?
화산으로 인한 지열과 온천의 나라 아이슬란드. 야외 온천탕인 블루라군(Bluelagoon)은 아이슬란드를 방문하면 반드시 가봐야 할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동네마다 군데군데 무료 온천탕(hot pot)이 있다고 들었지만, 지금까지 나는 패스해 왔다. 블루라군은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불가한 지역이라 뚜벅이인 나로서는 버스 투어를 신청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유명지를 굳이 10만 원이 넘는 입장료를 내고 가야 할지 망설여졌다. 온천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많이 가봤는데. 물론 블루라곤의 에메랄드빛 물과 뷰는 비교 불가겠지만.
불현듯 나이 지긋한 아이슬란드 아저씨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블루라곤 가봤남?”
“아… 아뇨.” (또 블루라곤 자랑인가)
“블루라곤 좋지. 그런데 비싸잖아. 우리나라에는 동네마다 수영장이 있거든? 그 물이 그 물이야! 값도 엄청 싸고. 거길 가.”
아저씨 최고.
위치를 확인해 봤다. 숙소 앞에 있는 저거, 수영장이었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이 천 원 정도. 이건 가야지. 아퀴레이리에서의 셋째 날 아침. 나는 수영가방을 들고 룰루랄라 나섰다.
수영을 못 한다. (운전도 못 해, 수영도 못 해…) 고로 이곳의 방문은 순전히 노천탕을 체험하기 위함이다. 라커 룸을 여닫는 것을 헤매고 있으니 할머니가 매의 눈으로 오옳지, 하는 표정으로 흐뭇해하더니 사라진다. 평이한 수영장이다. 그래도 성인용 수영장 두 개, 어린이용 두 개, 스파탕 세 곳, 스팀 사우나 한 곳, 그리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슬라이드 세 개가 있다. 성인 풀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강습을 받고 있고, 자쿠지에서는 연세 지긋한 분들이 앉아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몇, 외국인은 거의 없었다. 여유로운 평일의 수영장 모습이다. 그리고 수영장은 야외에 있다.
스파탕 중 하나에 몸을 담갔다. 한국처럼 ‘앗 뜨뜨’, 하다가 ‘어 좋다’, 혹은 ‘녹는다’ 싶은 온도는 아니었다. 적당히 따뜻하여 몸을 담그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물이 깨끗하다.
오전 10시. 삼삼오오 모인 푸짐한 덩치의 그녀들. 소곤소곤 까르르 까르르 하는 소리에 나 또한 슬며시 웃음이 났다. 분명 자주 만나는 사이일 텐데 대단한 비밀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 목소리를 낮추다가, 대화 중간중간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터트리는 웃음. 근엄한 표정의 아저씨들도 띄엄띄엄 앉아 있다가, 아는 남성이 나타나면 눈인사를 하고 낮게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비슷한 이 장면이 재미있다. 책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의 저자는 아이슬란드의 수영장에서 만난 여인들을 그림으로 묘사했다.
어디서나 아주머니들은 웃음이 참 많다.
통통하고 귀여운 십 대 소녀들처럼.
≪나의 드로잉 아이슬란드≫
아주머니들의 소곤소곤 이어지는 대화가 자장가처럼 잠을 부른다. 5월의 하늘은 맑고 따뜻한데, 정면에 보이는 산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있고, 탕 안은 적당히 따뜻해서 몸과 마음이 나른해져 온다. 나는 수영장 타일에 기대어 한참을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탁 트인 야외에서 느끼는 청명한 공기.
아주머니들과 눈인사를 하고 나왔다. 헉, 샤워실 입구에서 봐도 저 멀리 내 라커 문이 열려 있다. 헐레벌떡 뛰어가 봤다. 아까 내가 뭔가 헤맸던 게 역시나 제대로 잠기지 않았나 보다. 뒤돌아서 확인해 봐야 했는데. 다행히 없어진 것은 없었다. 친절하게 알려주기라도 하듯 라커 문 앞쪽에 스마트폰과 지갑을 떡하니 나뒀는데도. 안전한 나라 아이슬란드. 감사해요.
“아이슬란드에서 수영장은 중요한 존재야.”
이후 여행 후반에 다시 만난 도서관 사서 릴랴는 내게 수영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이슬란드에는 동네 곳곳에 공영 수영장이 있는데, 가격이 매우 저렴하고, 특히 은퇴자에게는 무료라고 했다. 수영과 온천 사우나는 기본적으로 건강에 좋은 데다가, 동네 수영장은 다양한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동네 사랑방 같은 존재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공공 운동 시설이 많이 있지만, 이렇게 촘촘한 동네 네크워킹의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아빠는 2년 전에 퇴직하셨는데, 그 이후로 매일 하루 두세 시간씩 수영장에 계셔. 어떤 날은 두 번도 가시고. 탕에 앉아서 동네 사람들 만나 이야기하고, 무료 커피도 마시고 오셔. 누구네 집에 가서 음식을 해 먹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같이 여행도 다녀왔다니까. 아빠가 일할 때는 한 동네여도 왕래 없었던 아저씨들인데 지금은 얼마나 친해졌는지 몰라.”
나는 하루 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여든이 넘은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근처에 사는 친구가 없어 겨우 일주일에 한 번 차를 몰고 고스톱을 치러 가시는데, 몇 차례 자잘한 접촉 사고가 있은 이후, 운전면허증을 압수해 버리겠다는 자식들의 협박 아닌 협박을 받는 중이다. 나는 씁쓸해졌다. 부러웠다. 이렇게 시선이 탁 트인 야외 탕 안에서라면 꼬장꼬장한 우리 아빠도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만, 우리나라 남자 은퇴자들은 다 뭐 하고 있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친구가 있다. 각자도생 하지 않는다. 돈을 쓰지 않아도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이 있다. 인생의 구간 구간에 맞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연스럽게 노년을 맞을 수 있다. 외롭지 않다. 두렵지 않다. 그렇게 오늘 나는 아이슬란드 인들의 대단치 않은 아지트를 경험했다. 그들이 정책을 만들 때 중요하게 여긴다는 '누구나 이용 가능하고(accessible)' '지속 가능한(sustainable)' 그런 곳.
친정 아빠께 안부 문자 한 통 넣어야겠다.
현지인을 만나는 방법을 비유하자면, 영국에서는 팝을 방문하거나 프랑스에서는 카페를 방문하는 것이라면 아이슬란드에서는 거주민들과 뜻깊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야외 온천탕에 앉아 있는 것이다.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채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은 삶의 계급을 지워버리고, 아이슬란드 사회가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평등주의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온천탕에서는 배관공과 정치인의 차이를 분간할 수 없다.
책 ≪스프라카르≫ 중
기존에 연재를 완료한 '엄마 혼자 버스 타고 아이슬란드'의 수정 버젼입니다.
다시 읽고, 기억을 되새기며 다듬고 있습니다.
회차에 따라 지난 연재와 내용이 동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