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저녁, 늦게까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후 지친 다리를 끌며 숙소가 있는 언덕을 올랐다. 그러다 벽에 대문짝만 한 글씨로 쓰여있는 ‘중고 서점’ 글씨를 발견했다. 왜 이걸 못 봤지? 기웃거려 봤으나 이미 영업시간이 끝난 상태였다. 내일 아침에 와봐야지.
아침밥을 지으면서 아이슬란드 음악을 들었다. 이 나라에는 자유로우면서도 부드러운 음악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국민 밴드인 시규어 로스(Sigur Ros)와, 역시 국민 가수인 비요크(Bjork)가 있다. 나는 에밀리아 토리니(Emiliana Torrini)의 음악을 좋아한다. 그녀의 몽환적이고 신비한 음색은 연한 파스텔컬러를 닮았다.
미친! 서점 문을 연 순간 제대로 된 곳에 왔다는 흥분감에 휩싸였다. 드디어 아퀴레이리에서 와야 할 곳을 왔어! 마음속은 난리법석이지만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아침햇살이 눈부신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공간. 적당히 어둡고, 그 흔한 커피 향도, 배경 음악도, 혹은 그 어떤 체면치레적 진열도 없는 단정한 공간. 그리고 그곳을 채우고 있는 책들은 얼마나 편안해 보이던지.
서점의 ㅁ자형 내부의 한 코너를 돌 때마다 이전 코너와는 또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나는 한 코너에서 다음 코너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서성였다. 감탄하며 책 제목을 훑고, 조심스레 책을 꺼내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그곳에서만큼은 나라는 존재에 티끌만큼의 경직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완전히 풀어져 갔다. 책들도 이런 나를 은근한 미소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게 뭐야... 트레져(보물)? 박물관에 있어야 할 책들이 꽂혀 있었다. 1880년 책이라. 손으로 만져도 되는 건가? 감탄하며 무심코 상소리를 뱉어버렸다. 진열된 책은 대부분 아이슬란드어로 되어있었지만, 오래된 영미 소설부터 독일어 책까지 언어와 장르가 다양했다. 나는 그림책 섹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모든 책을 다 꺼내 살펴보았다. 이미 다음 스케줄은 하찮아졌다.
새 책값이 5만 원을 훌쩍 넘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중고 책값도 만만치 않다. 이곳을 보면 나처럼 입틀막 하며 좋아할 우리 그림책 모임 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 덕분에 아이슬란드 도서관에서의 행사를 꼼꼼히 준비할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에 온 지 9일 차, 처음으로 기념품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녀들을 위한 책을 골랐다.
자그마치 1960년대 책 일곱 권을 샀다. 1960년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신데렐라 삽화가 재미있다. 올드한 삽화 인쇄 방식이 돋보이는 책도, 레이캬비크에서 출판된 어린이의 예절 책도 매력적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정도.
호기심으로 들어왔다가 사진만 다다닥 찍고 나간 몇몇 여행객들을 제외하고는 3시간 동안 나와 서점지기뿐이었다. 내가 머무는 내내 그는 책을 정리하고 데스크에 앉아 본인 책을 보았다. 나는 서점에 대한 감탄사나 품평 없이 조용히 계산을 하고 나왔다. 떠들썩하지 않다. 각자에게 충실하며 서로에게 정직하다.
내 안이 뭔가로 차란차란 채워진 듯한 느낌. 그러나 나는 서점 앞에 뚝 서버리고 말았다. 첫째, 이 서점이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라는 아쉬움 때문에. 둘째, 원래 가려던 박물관에 가야 할 시간이 훌쩍 지나 폐점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현실 지각에. 뛰어야 하나? 걸어서 30분 거리, 만만치 않다. 부지런히 출발해도 폐점 시간까지 겨우 30분을 남길 터였다.
“………………”
뛴다.
이 글을 쓰면서 중고 서점 '프로디'(Fornbókabúðin Fróði)에 대해서 찾아봤다가 깜짝 놀랐다. 몇 달
후에 폐점된다는 충격적인 소식이다. 건물이 팔렸다고 한다. 건물주가 나가라고 했나 보다. 다음에
또 방문하려고 했는데, '다음'이라니. 얼마나 섣부른 단정이었던지. 여행 중 아이슬란드 인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You have one life to live(인생은 한 번뿐이잖아.).” 한 번뿐인 이 시간이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다.
기존에 연재를 완료한 '엄마 혼자 버스 타고 아이슬란드'의 수정 버젼입니다.
다시 읽고, 기억을 되새기며 다듬고 있습니다.
회차에 따라 지난 연재와 내용이 동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