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참, 그 동네에는 시내버스가 없어. 실은 신호등도 없어.” 나의 안부를 묻는 릴랴의 메시지에 나는 조금 떨떠름해졌다. “그 동네는 보통 차들이 그냥 지나가는 곳이거든.”
흠, 일단 가보지 뭐.
백인 할머니, 아시아 남자,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을 태운 12인용 버스는 5월의 설산과 칠흑 같은 터널을 지나 1시간 반 만에 후사빅(후사비크, Husavik)에 도착했다. 저기 마트, 저기 박물관, 저기 교회, 저 앞이 해변. 버스에서 내리면서 휘리릭 체크한 게 다라는 것, 모든 것이 내 범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웃음이 나왔다. 새로운 정보를 찾고 입력시키느라 쉴 새 없이 머리를 돌려야 할 필요성도, 길을 잃을 일도 없다는 안도감과 편안함에서 나오는 웃음, 좋은 웃음.
우리나라의 강원도 삼척 정도의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삼척 인구 6만 2,500명. 후사빅 2,300명. 삼척이 6만 명 많구나. 삼척에서는 걸어서 여행을 다니지 않지.
숙소 로비에 짐을 맡기고 해변으로 향했다. 5월의 햇살은 강렬하고, 가까운 산에는 눈이 쌓여 있지만 춥지 않았다. 바닷가에는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동네 남자아이들이 열심히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질리도록 흔할 풍경을 나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이슬란드 수도에서도 차로 7시간이 넘는 거리. 북쪽에서도 더 북쪽으로 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득해졌다. 내가 여길 오다니. 그래, 더더 멀리 가자.
진상으로 보일까 봐 아이들이 가길 기다렸다가 주섬주섬 라면을 꺼냈다. 유튜버 해야 하나?
설산의 눈 녹는 정도와 해수면의 높이 변화는 이 풍경이 일상인 이들에게 피부로 느껴질 터였다. 기후 위기는 아이슬란드 인의 삶의 터전인 어업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고, 그들은 끊임없이 자연과 환경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메시지는 19시간 비행 거리의 우리나라에는 들리지 않겠지만.
바다에서 두 시간을 보내고 나니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눈에 들어왔다. 야트막해 보이는데 한번 올라가 봐? 평생 산과 친해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혼자서는 산을 가본 적이 없지만 여기서는 뭐든 혼자다. 찾아보니 10분이면 올라갈 거리. 만만할 것 같은데?
살짝 무섭다. 아니 꽤. 밤에도 환하지만 혼자 걷는 길은 너무나도 낯설다. 그냥 돌아갈까 망설이다 한국에서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계실 친정엄마가 떠올랐고, 그 힘을 빌려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숲이 걷히고… 그런데 갑자기 말이 왜 나와?
이 지역 농부들이 사는 덴가 보다. 평야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말이 보이고, 농장이 죽 이어져 있다. 올라오지 않았으면 몰랐을 풍경에 신기해하며 걸음을 계속하는데 이번에는 양과 염소. 낯선 이의 등장에 그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언덕을 조금 더 올라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순간.
감히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가 거기 있었다. 설산과 바다와 작은 마을과 트레킹 길. 때마침 완벽한 햇살. 양, 염소, 말. 내 눈은 앞에만 두 개 달렸지만 365도로 둘러싼 수많은 눈과 몸 전체로 풍경을 보고 있는 느낌. 음향은 새소리와 바람 소리뿐. 이곳에서 인간이란 그저 자연에 읍소하며 껴서 사는 존재.
이 미친 뷰를 나 혼자 봐야 한다는 게 미칠 노릇이다. 다급하게 셔터를 눌러보지만 당연한 듯 현실의 장면은 담기지 않는다. 안타깝고 안타깝다. 이 장면만으로도 내가 아이슬란드에 온 이유는 충분해진 것 같다. 잘 살자. 감사하자. 잊지 말자. 나는 이 장면을 본 눈을 가진 자이다. 같은 자리에 앉았다 일어섰다가 멍을 때리다가 사진을 찍다가 다시 멍을 때리다가. 풍경에 익숙해질 때쯤 허기를 느껴 배낭에서 샌드위치를 꺼냈다. 한입 문 순간 인기척을 느끼고 보니.
보상도 없이 사진만 찍어간 인간이란 존재에 어이없어하며 염소 가족은 가버렸다. 그때 코 닿을 듯 가까운 곳에 눈 쌓인 정상이 보였다. 정상까지 찍고 내려오자. 서 있던 곳에서 몇 걸음 차이였지만 조금 더 위로 올라가자, 농장도 염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펼쳐진 들판 위의 나만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키 큰 들판 사이로 집채만 한 사자 한 마리가 공격해 올 것 같은 상상이 들었다. 그러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번개처럼 소름이 쫙 끼쳤고,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간신히 발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아이슬란드에서 사자라니! 화산과 추위로 겨우 날 파리 정도나 마주칠 수 있는 나라에서 나는 목표물을 쏘아보고 있는 사자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상상했고, 그 상상만으로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하찮은 나를 경험했다.
넋 놓고 풍경을 감상하던 처음의 장소에 이르자 미친 듯 뛰던 심장이 겨우 진정되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그래 봤자 5분 거리. 나는 담대함이라고는 1도 없는 나라는 존재에 혀를 끌끌 차고 아직 마르지 않은 식은땀을 닦으며 언덕을 내려왔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겨우 24시간뿐이라는 생각에 2초에 한 걸음씩 갈지자로 걸으면서.
이 마을을 그냥 지나친다고? 사실 더 큰 일은 그 다음날 일어났다.
기존에 연재를 완료한 '엄마 혼자 버스 타고 아이슬란드'의 수정 버젼입니다.
다시 읽고, 기억을 되새기며 다듬고 있습니다.
회차에 따라 지난 연재와 내용이 동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