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에 머물면서 가장 많이 중얼거렸던 말은 두 가지이다.
“Shit(망할).”
“I’m not scared(나는 두렵지 않아).”
핸드폰 어디 갔지? 내 신용카드! 딱 하나 가져왔는데 잃어버린 건가? 망한 건가? 해외 모바일 사용도 신청 안 해 놨는데. 여권은 또 어디 갔어? 버스비가 현금만 된다는데 은행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분명히 내비게이션으로는 여기인데. 뭐! 주말에는 버스가 운행을 안 해? 망한 건가? 국립박물관 오늘 가야 했는데 시간이 지나버렸네. 오늘뿐이었는데. 망할 가방! 괜히 백팩을 메고 오겠다고 객기를 부려서. Shit, shit… shit!!!
한편,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또 다른 말은 “I’m not scared”이다. 나는 아주 자주 이 말을 중얼거렸다. 아이슬란드 도서관에서 한국 그림책을 소개하던 날, 낯선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텅 빈 고속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위해 서성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대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이후 외곽으로 혼자 여행을 다니면서는 늘 자연과 함께였다. 평생 도시에서 살아서 인공의 정원이 편하고 익숙한 나에게 아이슬란드의 대자연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보통 자연을 ‘경이롭다’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그냥 무서웠다. 불과 물의 나라로 표현되는 아이슬란드는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화산과 빙하로 나무가 자라나기 어려우며 흙빛의 지형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디스토피아, 즉 지구 멸망 후를 다루는 SF 영화나 달 표현 착륙 장면의 주된 촬영지이기도 하다.
아이슬란드는 사람들이 대자연을 마주 보기 위해 여행하는 곳이지만 실상 나는 관심이 없었다. 수도 레이캬비크에서만 머물면서 카페에 앉아 빈둥거리고 도서관이나 미술관만 서성여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덧 아이슬란드의 자연은 내게 스며들고 있었다. 전날 뒷산에서 본 눈부신 뷰가 떠올랐다. 마치 그날 아침 숙소 주인장이 추천해 준 트레킹로가 생각났다. 실실 가 봐?
나는 평소 잘 걷지도 않는다. 이런 내가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을과 멀어졌는데 내가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하고 구해 주러 오지도 않을 것 같았다. 들리는 거라고는 자갈을 밟고 있는 내 발소리와 바람 소리, 새소리뿐이었다. 어느덧 바람이 강해지더니 미친 듯이 불기 시작했고,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덮쳤다. 백야라 밤도 낮처럼 밝고,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라 누가 덮쳐올 사람도 없었다. 맹수는커녕 벌레도 흔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벌벌 떨었다. 자연이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나를 받아들일지 말지 간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급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빌었다.
“자연의 여신님, 나무, 산, 바람아… 나를 받아들여 주세요. 제발!”
그리고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I’m not scared. I’m not scared. “I’m not scared. I’m not…”
머릿속으로는 포기할까, 되돌아갈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으로는 나는 두렵지 않다고 절규하듯 중얼거렸다.
푸드덕 날아오르는 새소리에 비명을 지르고, 얼음 바닥에 미끄러지기도 몇 차례. 주변 광경을 마구 찍다가 폰마저 방전되어 꺼진 상태였다. 두려움에 시선을 멀리 둘 수도 없었다. 바로 앞만 보고 가자. 바로 앞만… 그렇게 한참 후, 갑자기 눈앞에 물줄기가 펼쳐졌다.
마치 사진에서 본 백두산 천지처럼 동그란 형태의 호수에는 강하게 파도가 치고 있었다. 호수는 모름지기 잔잔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미친 듯한 파도가 기이했다. 그 호수의 중간에 서서 내 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았다. 호수가 씽긋 웃고 있었다.
“왔구나?”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호수. 요새처럼 둘러싸인 물줄기와, 호수를 둘러싼 설산, 그리고 수많은 새, 휘몰아치는 바람…. 그 모든 것이 365도 파노라마처럼 나를 에워쌌다. 그들은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였고, 그 느낌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처음 느껴보는 영적이며 마법적인 경험에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들은 분명 나를 호명하고 있었다.
I’m not alone! Thank you, mountain! Thank you for welcoming me! Thank you, wind! Thank you, birds!
나는 혼자가 아니야! 고마워 산아! 나를 환영해 줘서 고마워! 고마워 바람아! 고마워 새들아!
나는 기쁘고 떨리는 마음으로 소리를 지르고, 하하하 미친 듯이 웃고, 그러다가 갑자기 흑흑 대며 울다가 돌연 산에 보답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전미도의 버터플라이(butterfly)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가 생각이 안 나 엉망진창이었다.
태양처럼 빛을 내는 그대여어~~~~~
이 세상이 거칠게 막아~~~서도~~~~
빛나는 사~아람아~~~~~ 난 너를 사~아랑해~~~~~~
널 세상이 볼 수 있게 날아 저 멀리~~~
진정한 광녀였다.
폰이 방전되어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채 나는 여러 번 뒤를 돌아보며 산에서 내려왔다. 두려움이 사라진 뒤의 산의 공기는 여전히 차가우면서도 동시에 따스했고, 바람이 나를 등 뒤에서 가볍게 밀어주는 듯했다. 산을 오르며 영겁처럼 느껴지던 그 시간이 사실 왕복 두 시간 거리였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여기 다시 오겠다고 장담하긴 어렵지만 영원히 기억할게!”
나는 끝까지 1인극을 찍고 룰루랄라 내려왔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있다. 두려움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경이롭다. 나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체험했고, 이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도 두려움에 떨며, 그러나 또 다른 산으로 하이킹을 이어 갔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음에 아이슬란드에 올 때는 제대로 하이킹 준비를 하고 오겠노라고.
블라인드 포인트(Blind Point). 모퉁이를 돌면 그곳에 어떤 죽음, 혹은 삶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험악한 등정. 그러나 누구나 그 블라인드 포인트를 돌아야 할 수밖에 없고, 초보 등산자들은 그 블라인드 포인트 앞에서 주저앉는다고 한다. 공포를 이겨낸 자에게만 산은 정산을 선사한다. 당시 내가 간 곳은 악산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 블라인드 포인트라는 말을 떠올렸다.
내가 가진 두려움, 나의 작음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내려놓으면서 그럼에도 한 발자국씩 걸음을 떼어 나가는 것. 오늘도 나는 그렇게 나아가보고자 한다.
Botnsvatn Lake: 아이슬란드 북부 작은 마을 Husavik 내 호수
기존에 연재를 완료한 '엄마 혼자 버스 타고 아이슬란드'의 수정 버젼입니다.
다시 읽고, 기억을 되새기며 다듬고 있습니다.
회차에 따라 지난 연재와 내용이 동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