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딴짓 Nov 26. 2023

이름을 물어도 될까?

어떤 꿈 

트렁크 하의와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은 헝클어진 모습의 내 앞에 반투명 현관문으로 남자 몇이 기웃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여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와 나의 당황스러움은 두려움으로 변했는데, 알고 보니 중3 큰 아들과 친구 무리였다. 앞장서서 들어오는 아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나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친구들이니? 이름이 뭐야?"라고 물었다. 아들은 답이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눈동자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무시받았다는 생각에 연거푸 절박하게 물었지만 어느 누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꿈에서도 나는 기억했다. 몇 달 전, 깜빡한 물건을 가지러 집에 다시 들어갔을 때 거실에서 마주친 아들과 또래 녀석 하나. 서로 당황하며 엉거주춤 서 있던 그 순간, "친구 왔구나? 이름이 뭐야?"라고 물었다. 당연하게 들려질 줄 알았던, 그러나 정적. 한 번 더 물었더니 나를 노려보며 "엄마, 그만해."라고 말하던 내 아이와 그 말에 어쩔 줄 몰라하던 나. 어른이, 엄마가 내 아이 친구의 이름을 묻는 것이 그토록 유별난 일일까. 이름 하나 얻어 내기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나는 내 아이와 심지어 그 친구 앞에서도 그렇게 가볍고 우스운 존재이던가. 경계와 불신의 존재. 나의 소중한 친구 이름은 결코 알아서는 안 될 존재, 엄마.  

 


"나가자." 아들의 말에 녀석은 가벼운 목례 정도도 생략한 체 나에게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유유상종이라고 똑같은 놈들이네. 앞 길이 훤하다. 부모에게 참 배워먹지 못했구나. 나는 분노에 휩싸여 현관문을 노려 보았다. 루저 같은 놈들... 

 


분노가 조금 누그러지자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조금 전의 그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의 눈빛과 몸짓에는 불안함이 보였다. 어른에게 좋은 인풋을 받지 못했구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나를 보며 아이는 혼날 거라고 생각한 걸까. 혹시 구타가 있는 가정은 아닐까. 혹시 나의 억지 미소와 신원을 캐내려는 눈빛을 감지했던 것은 아닐까. "이름이 뭐야?"라는 내 말을 "넌 또 뭐야?" 심지어 "이건 또 뭐야?"라고 해석한 것은 아닐까. 

 


예상치 못한 맞닥뜨림 앞에 조금 더 섬세하게 다가갔어야 하지 않았나. 그저 "친구 왔구나! 반가워! 자주 놀러 와!"라는 말을 남기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줬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아이들에게도 한숨 돌린 틈을 줬어야 하지 않았나. 청소년인데. 

 


그럼에도 억울하고 슬픈 마음이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해져서 나는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아...  

 


나는 왜 그 일을 꿈으로 재현해 냈을까? 잊히지 않은 마음의 상처, 여전히 아른거리는 내 아이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어제저녁에 만난 학부모들 사이에서 느낀 한없는 외로움... 이 모든 것들이 재구성되어 나를 다시 한번 가격 한 것이 아닐까. 스포츠 해설가가 되겠다며 관련 학교의 정보를 스스로 찾아 진학을 결정한 아이, 10년이 걸려도 반드시 의사가 되겠다는 포부를 부모에게 밝힌 아이,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영상을 제작한 아이들. 나는 이 학교가 너무 좋았고 많은 것을 배워서 여한이 없다는 아이... 우리 아이는 치를 떨면서 싫어했고 결국 1년을 남기고 나온 그 학교. 똑같은 학교.   

 


머리를 거칠게 흔들어본다. 겨우 몇 명과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인데. 아이도 자신의 부모를 다른 부모와 비교할 텐데 말로는 뱉지 않잖아. 뱉지 말자. 아니, 비교하지 말자. 나는 나고 그들은 그들이고. 내 아이는 내 아이고. 

 


꿈에서 좋은 면은 없었을까. 부스러기 아닌 가루라도 찾겠다는 심정으로 곱씹어 본다. 꿈에서 내 아이는 서넛의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아픔이든 슬픔이든 못남이든 뭐든지 간에 나눌 수 있는 친구. 그저 어딘가에서 함께 어슬렁거릴 수 있는 존재.  문득 그 아이가 떠올랐다. 내 아이가 전학을 나온 후 심연 속을 헤매고 있던 그 시절, 새로운 학교에서 사귄 첫 친구일 터였다. 잘 보이고 싶은 친구일 터였다. 내 아이에게 친구가 되어 준 녀석. 무언가의 공명함으로 서로에게 이끌렸을 존재. 고마운 존재. 

 


잘 지내고 있니, 아들? 그때 아줌마가 급 발진해서 미안해. 닿지 못할 말을 허공에 뿌려본다. 그래도 다음에 다시 만나 이름을 알게 된다면 다정하게 불러줄 텐데,라고 뒤끝 어린 생각을 해보면서.  

 


퍼뜩, 책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침, 백은선의 책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이상하고>를 읽다가 잠시 졸던 중 꿈을 꾸었다. 

 


이름이란 정말 좋은 것일까장미는 장미라고 부르지 않아도 장미인데이름이란 아름다운 동시에 대상화의 가장  단계인  같아서이름이라는  자체가 애초에 비극의 성질을 가진  같다.

혹시 이것 때문에 꿈을 꾼 걸까? 어쩌면 꿈에서 이름을 집요하게 묻던 나의 행위는 이름을 물은 후에 어디 사는지, 부모는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과목을 좋아하는지 등을 엮인 굴비 당기듯이 묻고, 그러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질 수 있는 '나는 어른'임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의 꼰대스러움이 드러난 꿈이 아닐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름을 듣지 못했다고 서글픔에 취해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나는 해몽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름을 취조했고, 그들도 답변하지 않았으니 쌤쌤인 걸로. 

 


그래서 다음에 그 아이를 만나더라도 먼저 이름을 캐묻지 않겠다는 쿨한 마음을 가져본다. '내 이름은 OOO인데 네 이름은 뭐니?'라는 식도 생각해 봤지만 그 또한 '내 거 깠으니 네 것도 까'라는 것 같아서 패스하련다. 뭐가 중요하겠나. 장미라고 부르지 않아도 장미인데. 그리고 혹시라도 먼저 이름을 이야기해 준다면 고운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러 보겠다. 






아, 그런데 브런치에 이렇게 꿈 얘기까지 까발려도 되는 걸까. 일기스러운 이야기를 심지어 작가들의 공간에 올려도 되는 걸까. 지난주에 업로드를 시작한 신생아 글쟁이로서 뒤늦게 현타가 온다. 부디 그들이 이 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주기를. 


작가의 이전글 아이슬란드 대통령 영부인을 흠모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