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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숲에서 울다

by 딴짓


폭설 뉴스가 종일 이어진 어제 오후, 나는 보고 싶은 이들을 기어이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예정대로 길을 나섰다. 다행히 고속도로 상황이 나쁘지 않았고, 수년 만에 만에 대학 동창들과의 모임 후 집으로 가는 마지막 광역버스에 몸을 실었다.



40분 여분을 달려 집 근처에서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그 자리에서 뚝 멈춰 섰다. 집을 나설 때도 이미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던 눈은 그동안도 쉬지 않고 내린 듯 바닥에 쌓인 눈의 두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 발짝 내딛자 발이 푹 빠지며 발목까지 올라온 부츠 안으로 눈이 스며들었다. 자정을 10여분 앞둔 늦은 시간, 거리에는 오가는 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상가가 밀집된 아파트 정문 쪽과 달리 후문 끝에 위치한 우리 단지 주변은 평소에도 무척 한산하다. 주요 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도 없다. 그래서 나는 평소 이 애매한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까지 10분 정도를 걸어간다. 두 아파트 사이의 작은 숲길을 지나, 계단을 내려간 후, 탄천 돌다리를 건너 다시 계단을 오르면 우리 동이 나온다. 큰길을 따라가도 되지만 나는 이 경로를 선호한다. 이 길이 말로 다할 수 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봄가을 숲길의 풍경은 매번 나를 넋 놓게 했다.



하지만 이렇게 깊은 밤에 큰 눈을 맞으며 혼자 걸어본 적은 없었다. 대로로 갈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짧게 숨을 고르고 숲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 길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눈 덮인 풍경에 낯설어하는 내 마음이 나 스스로를 주저하게 했다. ‘저 들어갑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숲에 허락을 구하며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나도 모르게 탄식을 하고 말았다.


숲으로 들어서자 마치 딱 하고 조명이 켜지듯 온 시야가 환해졌다. 눈이었다. 그렇게 하는데 이유 따윈 없다는 듯 맹렬하게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묵묵히 받아내고 있는 나무들. 눈의 무게에 축 처진 나뭇가지, 눈으로 다 덮인 아직 어여쁜 단풍잎까지. 자연의 거침없는 모습, 그 무자비함, 그럼에도 그 상황을 가만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무의 모습에 나는 그저 숙연해질 뿐이었다. 그 순간, 숲의 모든 나무들은 얼마나 애쓰고 있을까? 어머니 나무들은 어린 나무들에게 정신없이 메시지와 에너지를 보내고 있겠지. 버티자. 힘내. 한 그루의 나무는 최대 만 그루의 나무와 소통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순간, 6개월 전 다녀온 아이슬란드에 대한 그리움이 눈 폭풍처럼 몰려왔다. 황량한 아이슬란드의 황야 속으로 걸어 들어서며 두려움을 삼킨 기억. 자연의 여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온전한 느낌과 아주 조금씩 움트던 용기. 오직 바람 소리와 내 발소리뿐이었던 고요한 순간들. 가만히 기도를 읊조리며 한 발자국씩 나아갔던 그때.



나는 빨리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도, 무서움도 잊은 채 꼼짝없이 숲 속에 서서 울고 말았다. 남편에게 전화가 오고 나서야 버스에서 내린 지 30분이 훌쩍 지난 것을 깨달았다. 마술에서 깨 듯 그제야 한기가 느껴졌다. 몸을 움직이자 어깨 위에 수북이 쌓였던 눈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눈 속에 파묻혀 숲의 일부가 되었던 내가 비로소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듯했다. 우산도 장갑도 가방 안에 그대로였다.




사실 나는 아이슬란드의 겨울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5월의 아이슬란드는 그것대로 충분히 좋았다. 아이슬란드의 겨울은 너무 춥고 어둡고 위험할 거라는 생각에 다시 가더라도 겨울은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 이민자 출신 아이슬란드 여성으로부터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 겨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모든 이들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을 교환하고, 집집마다 촛불을 밝히는 12월의 마지막 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반드시 겨울의 아이슬란드를 경험해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큰 아들이 열일곱 살이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되는 3년 후, 나는 다시 아이슬란드에 가보려고 한다. 그때도 나는 걸을 것이다. 두려움 속에서도 한 발자국씩.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당당하게. 그렇게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겠다.



* 첫 번째 사진은 집에서 출발하며, 나머지 사진은 귀갓길에 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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