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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Dec 13. 2023

책이 안 써져 새벽 산책을 시작했다 Day 3

책이 문제가 아니다 

오늘도 산책을 나왔다. 미적거리다가 간신히 나왔는데, 피곤한 몸과 마음을 이끌고도 꾸역꾸역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다급했기 때문이다. 머릿속의 공허함과 좌절감을 비워야 했다. 마음을 채워줄 평화로운 에너지가 필요했다. 어쩌면 아침에 홀로 걷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감이 코 앞인데 초안이 써지지 않아 시작한 산책이었다. 뭐라도 머릿속에 떠오르길 바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그런데 또 잊고 있었다. 쓰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을 잘 사는 것이라는 것. 매일을 단단하게 지키고 있어야 글도 잘 써진다는 당연한 진리. 






어젯밤 화장실을 가려고 나왔다가 큰 아들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통화 소리를 듣고 나는 온몸이 굳어졌다. 중간부터 들어서 내용이 확실하진 않았다. 정확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떤 형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들의 목소리에는 이상하리만큼 극도의 깍듯함이 있었다. 스피커폰에서 들려오는 형이란 사람의 거만에 가까운 목소리는 주변 여자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로 몇 번이나 묻히곤 했다. 그리고 그중 몇 개 단어가 내 심장을 죄었다. 밤 10시에 아들을 불러내는 사람, 그러나 아들은 컨디션이 좀 안 좋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전화를 해서 '그렇게 전화를 끊어 죄송하다'라고 말을 덧붙인 후 통화를 종료했다. 



수많은 생각이 온몸을 강타했다. 성적이나 대학이 문제가 아닌지는 오래되었다. 그저 건강하고, 교우 관계가 원만하길 바랐다. 그뿐,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기대하기 어려운 세상이라 늘 불안함이 뿌연 안개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아들의 방을 급습할 수는 없었다. 방금 그 전화 뭐냐고 다그칠 수 없었다. 그러한 방식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솔직히 두려웠다. 어느새 나는 아들과의 대화가 어려운 엄마였다. 



다음 날 아이가 학교에 다녀온 후 좋게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나는 잠들지 못했다. 책이고 뭐고, 원고고 뭐고... 나는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집과 인접한 탄천의 물줄기는 고요했다. 오늘은 비가 안 왔기 때문일까. 탄천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오늘따라 새들도 울지 않아 소리가 제거된 듯한 그 풍경이 낯설었다. 순간적으로 다 멈춰버린 것 같았다. 세상도, 내 마음도. 그러나 몇 발자국 더 나아가자 탄천의 흐름이 조금 더 빨라지고 그렇게 조금씩 물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좔좔좔



그제야 나는 숨을 내쉬었다. 

휴우...



안도감과 함께 생각이라는 것도 조금 돌아왔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그 광경에 안도했다. 흐르는 물, 내가 멈추려고 한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닌 그것, 모든 것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것. 물도, 나도, 너도, 우리의 시간도. 



동시에 우직하게 한 방향으로, 오직 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그 흐름이 오늘따라 부모의 모습인 것 같아서, 엄마들의 모습인 것 같아서, 나는 한참을 탄천만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뭔가를 붙들고 싶은 마음에 간절하게 풍경을 더듬고 또 더듬었다. 






밖을 나오면 여기저기에서 엄마를 만난다는 지인의 말이 생각났다. 산책 길에 만난 나이테가 아주 두꺼울 것 같은 나무 사진을 내게 보내온 그녀였다. 지나가는 그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지만 늘 그 자리에서 우직하게 사계절을 견디고 있을 나무, 나무들.  


지인이 지난 계절에 보내온 사진


"여기저기서 엄마를 만나요"


"산책 갔다가 만남 엄마"


"힘이 필요할 때는 그냥 힘! 을 내보세요 생각 말고 그냥 힘 ^^" 


"그 힘이라는 단어와 함께 나타나셨던 ㅎㅎ" 





내가 보려고 하자 그들이 자신을 보여 주었다. 내가 귀를 열자 내게 말해 주었다. 애쓴다고, 괜찮다고, 힘내라고, 잘하고 있다고, 별일 없을 거라고. 그렇게 탄천 물이, 나무가, 풀이, 바람이, 엄마들이 내게 온기를 보내왔다. 오늘 아침, 그렇게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서서 그들이 주는 것을 온전히 받고 조심조심 귀가했다.  



아들과 잘 이야기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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