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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Dec 15. 2023

공저 쓰기에 대한 나의 자세

나를 세우기 위한 밑 작업

공저를 쓰기로 결정한 내 마음을 ‘일단 해 보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은 곧 주저함으로 바뀌었다. 나는 내 안의 기발한 뭔가가 떠오르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없었고 그 사이 공저 쓰기에 대한 마음은 다소 빛이 바래는 지경까지 쭉 미끄러져왔다.




남들과는 다른 반짝거리는 소재가 떠오르길 바랐지만 그러한 언어는 없었다.

그러자 나는 무작정 아침산책을 시작했다.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종의 즉흥적인 인간으로, 머리가 먼저였는지 몸이 먼저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돌연 아침에 걷는 자가 되었다.




실로 대단치 않은 짧은 외출이었다. 

부스스 일어나 30분간 짧은 독서를 하고 바깥이 어슴푸레 밝아올 때쯤 잠옷 위에 바지와 롱패딩을 걸친 후 추적추적 탄천 길을 내려갔다. 덜 깬 눈으로 물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새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렇게 바람과 소리가 이끄는 대로 가고 보고 터벅터벅 집을 찾아 돌아왔다. 그 행위만으로 유레카가 외쳐지지는 않았지만 뭐인지 모를 작용으로 내 안의 찌든 때가 조금씩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안에 덕지덕지 발라진 그것은 피곤, 지침, 마음의 늙음, 약간의 분노와 지긋지긋한 자기 불신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내 안이 말갛게 되길 희망했다. 그리고 그 안을 평온함이란 단어로 채우고 싶었다. 진짜 에너지, 그러니까 내 안의 진짜가 나오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온기가 필요했다.




글을 쓰기 위해 나는 나를 똑바로 바라봐야 했다.

나는 스스로가 지금 무엇에 주목하고 있는지가 궁금했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는 나이길 바랐다.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닌 현재의 나 자신을 주목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하길 바랐다. 비록 일개 공저일 뿐일지라도 내 무대의 연출자로서 깨인 눈으로 스스로를 텍스트 안에 제대로 담아내기를, 그리고 관객이자 독자로써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기를 갈망하고 또 갈망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기간에 흰 종이에 완전히 새로 쓴 새 글이 필요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보고 일직선으로 쭉 나가는 글을 쓰고 싶었지만 나를 밀고 흔들며 바닥으로 거칠게 끌어내리는 것이 있었다.

엄마로서의 자아였다. 엄마로서 스스로의 부족함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매번 주저앉는 느낌이었고 그때마다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엄마가 된 후로 육아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종종 생각했고,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남과 스스로에게 말하고, (우리 엄마나 시어머니를 보면 엄마라는 자리는 평생 끝날 것 같지 않은데) 이 또한 지나간다는, 나아진다는 말이 아리송했고, 그렇지만 차선책이 없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는 막연함이 답답했다. 한 마디로, 지긋지긋했다. 아이에 대한 실망과 분노 ->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죄책감   -> 자존감 급락   -> 너덜너덜해진 스스로를 주어 담는 무한 프로세스. 공저 쓰기를 앞두었다고 그러한 마음이 깨끗이 정리될 리 없었고, 그럴 바에라, 에라, 그럼 내 마음을 제대로 물고 늘어져볼까? 싶었다. 구체적 감각을 되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눈 여겨 두었던 이 책을 하필 지금, 혹은 완벽한 타이밍에 읽었다. 책 <엄마 됨을 후회함>.







후회와 회피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감정이다.

수많은 크고 작은 결정에 우리는 후회를 한다. 그런데 엄마가 된 것의 후회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엄마가 되기로 한 결정은 불행하다고 느껴서도, 표현해서도 안 된다. 사회는 이야기한다. 엄마가 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그리고 일단 엄마가 되면 이야기한다. 엄마가 된 이상 절대 후회의 감정으로 뒤돌아보면 안 된다고. 오직 엄마로서의 삶에 대해서는 “엄마라서 참 좋아요”만 허용된다. 좋은 엄마, 참된 엄마.




대체 왜?


왜 안 되는데?


그건 누가 정했는데?


후회한다는 것이 엄마이기를 포기한다는 말이 아닌데?




책의 질문을 따라가 보았다.

“자녀에 대한 지금의 지식과 경험을 가진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엄마가 될 뜻이 있습니까? 아이를 가질 뜻이 있습니까?”  

- ‘아니오.’

“엄마로서의 삶에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 ‘음…… 네.’

“장점이 단점보다 월등하게 많다고 생각합니까?”
 - ‘아-아-니-오.’

역시 그랬군. 솔직하네. 책을 읽을 자세가 되어 있구먼.  




나는 큰 아이를 가진 17년 전을 떠올려보았다.

새벽 2시까지 야근이 일상적이었던 시기, 나에게 출산과 육아는 낯선 영역이었다. 남편과 이야기해 본 적도 없었다. 갑작스레 생긴 내 안의 생명체에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8주 후 돌연 그 존재와 작별을 해야 했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휘몰아쳤다. 내가 귀중하게 여기지 않아서 유산으로 이어진 듯했고, 다음 생명이 찾아와 줄까 두려워졌다. 마치 수십 년간 아기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나는 조급해졌다. 내가 진정으로 엄마가 되길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다. 엄마가 된다는 것의 현실적 의미에 대해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고, 나의 결정이라는 것이 실은 사회의 규범, 차별, 권력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지… 와 같은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다. 내 나이 서른이었고, 왠지 이쯤에서 아이를 가져야 할 것 같은, 오직 시기만 고려한 수동적 결정이었다. 분명 어른의 결정이었는데 나는 여전히 미성숙한 아이였다. 책에서는 '제도화된 의지'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책은 엄마들의 내면세계를 일반화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엄마 됨을 후회하라고 부추기는 책이 아님을 밝힌다. 저자는 침묵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다. 내 목소리를 내는 것에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관념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게 하는 것.



행간에서 여성들이 자신을 재발견할지는 여성들 스스로의 몫으로 남겨둔다.




그래서 나는 꼭꼭 눌러써 본다.



나는

엄마가 된 것을 꽤 후회한다.

사실 엄마가 잘 맞지 않는다.

엄마로서 긍정적 존재감을 찾기가 꽤 어렵다.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되겠다는 서툰 결정에 있었다.

그러니 나는 과거의 나를 비난하지 않겠다. 처음부터 비난의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그러니 과거의 나를 놓아주자.




그런데 나는 엄마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나의 느낌을 직면하자.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도 표현하자.  

그럼으로써 후회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겠다.

엄마로서의 역할에 서툰 나 스스로를 더는 할퀴지 않겠다.





엄마라는 하나의 자아에 매몰되지 않겠다.

끌려 다니도록 나를 내버려 두지 않겠다.

엄마가 됨으로써 언젠가는 모든 것이 나아질 것이고 결국에는 행복감을 느낄 것이라는 신화적 상상에 취해있지 않겠다.

좋은 엄마를 강요하며 언제든지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사회에, 당신에게, 필요하다면 용기 내어 말하겠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지 않겠다.




엄마들을 타인에게 봉사하는 객체로 여기지 않겠다. 다른 엄마들에 대해서도. 나의 엄마, 나의 시어머니에 대해서도. 엄마들을 서투르게 위로하거나 화제를 바꾸거나, 아이가 이만큼 컸으니 금방 클 거라던가 그 아이가 커서 효도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헛소리를 하지 않겠다. 차라리 내가 도울 부분을 돕겠다고 하거나 술을 한잔 더 사겠다(미안해요 아이 셋 맘 J 언니).





부모의 잘한 행동뿐만 아니라, 부모의 오류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자식들을 이끌어 주는 것. 후회에 대해 알려줌으로써 무조건 엄마가 되는 일직선에서 벗어나 다양한 길을 열어주는 것.

내 육체와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가능성을 갖는 것.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에게 책에 나온 표현을 응용하여 글로 고백해 본다. 훗날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이에 대해 잘 말하기 위해.


(딸은 없습니다)


큰 아들 OO아,

서른 살의 여자는 아이가 없으면 남들과 다를까 봐, 그래서 인생이 불완전해질까 봐,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봐 두려웠어. 그래서 아이를 낳았어. 그런데 힘들었어. 정말 힘들었어. 많이 좌절했어. 그렇지만 너를 정말 사랑해. 그리고 네가 어른이 되면 뭐든지 반드시 네 스스로가 결정을 내려라.  



작은 아들 OO아,

맞아, 난 너를 가질 생각이 없었어. 하지만 네가 태어났어. 그리고 너를 정말 사랑해. 엄마의 결정과 너의 존재함은 완전 다른 거야. 그리고 네가 어른이 되면 네 스스로가 결정을 내려라.







나는 누구이길 바라는가

책을 덮고 나는 엄마 다음으로 시어머니, 그다음으로 할머니가 된 나를 상상해 보았다. 그러니까 어느덧 고등학생 자녀의 엄마가 된 것처럼 어영부영 또 할머니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누군가의’ 할머니가 되길 원하는가?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일까 아닐까? 나의 의지인가 아닌가?







그래서 이제 나는 책을 쓴 준비가 되었는가?

나 스스로를 흔들어 보아야, 그렇게 스스로 솔직해져야, 나의 삶을 단순화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앞으로 쓸 글도 솔직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간이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 공간인가 싶은 쫄리는 마음도 없지 않지만 글이란 원래 삶의 구체성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냐며 이 글 또한 밀어내어 본다.



책에 나온 표현들을 인용한 구절들이 있습니다(많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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