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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Dec 12. 2023

18년 전 내 결혼식 전 날 쓴 아빠의 글을 발견했다

팔순 아버지의 글을 정리하며



올해 우리 아부지는 80세가 되셨다. 그리고 작년부터 누누이 말씀해 오신 '수필집 한 권'에 대한 소망을 강조하시며 나에게 조심스레 원고를 넘기셨다. 다른 거는 다 필요 없고 그냥 한 권으로 묶어만 달라고 하셨다. 주위 분들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하셨다.




평생 언론인이셨던 아부지. 필드를 떠나신 지 이미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간 모아 오신 수필, 시, 사설, 인터뷰 글이 상당할 터였다.




아빠가 매일매일 수십 번은 더 보고 고치고 추려냈을 글들. 독수리 타법으로 한 땀 한 땀 타이핑 하셨을 원고를 USB에 담아왔다. 그게 A4 파일로 장장 200 페이지. 책으로 만들면 400페이지가 넘을 분량이었다. 나는 기겁했다.



원고를 받은 지 수개월이 지났고 아빠는 진행 상황이 몹시나 궁금하실 터이지만 일하랴 육아하랴 바쁜 딸내미에게 채근하지 않으시려 인내심 있게 기다리셨다. 궁금하다, 단 한 번을 전화하지 않으셨지만 얼마나 전화를 기다리고 계실지, 눈에 선했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나의 일상이 먼저였다.

"한번 읽어 보았니?"

"네, 그럼요. 한번 쭉 읽어 봤지요. 띄어쓰기랑 고칠 것도 좀 고치고."

"그래, 다 읽어 봤다는 거지..."



전체 글의  사분의 일도 읽지 않은 상태로 한 달이 또 지났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아빠께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아빠의 생신이 있는 이번 달을, 아니 올해를 넘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필 나 또한 이번 달에 공저책을 내야 하는 스케줄이 있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이었다. 내 코가 석자였다. 아니, 내 것이 먼저였다. 사실 아빠가 부탁하신 건 수개월 전인데, 나는 그렇게 아빠의 원고가 귀찮아졌다.



대강 빠르게 원고를 훑어나갔다. 한글 파일에서 오류로 잡힌 것은 다 고치셨다고 했지만 띄어쓰기와 철자 오류 등이 빈번했고, 시대정신을 반영한 그 세대 특유의 꼬장함이 배어 있는 글귀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혀를 끌끌 찼다. 나와 반대편에 서 있는 정치색이 들어간 텍스트 한 두줄에도 기겁했다.



그러다가 어느 시를 읽었다.

 


허무



장롱 속 깊은 곳 빛바랜 보석

갈고닦아 가슴에 품어볼 겨를도 없이

여름밤 장대비 되어 산산이 부서졌네

탐스럽게 익은 열매(자식)도 떨어지고

다시 일굴 논· 밭, 농부도 없네

그래서 내 인생은 휴지처럼 구겨진 3류 소설



2004년 11월 24일

예쁜 딸 혜영을 생각하며



멍해졌다.

11월 24일. 내 결혼식 전날.



내 결혼식 생각에만 사로 잡혀 부모의 마음은 안중에 없었을 시기였다.

아니 그 후에도, 지금까지도, 당시의 아빠의 마음은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그랬다.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아빠는 자신의 인생이 구겨진 3류 소설처럼 허무하셨나 보다.

소설처럼 써 왔는데 구겨진 것처럼 여기셨나 보다.

아빠에게 나는 보석이었구나.

품어볼 겨를도 없었던 보석.



평생 다정한 아빠 역할과는 거리가 먼 사람. 입으로 나온 말이란 말은 죄다 칼과 같았고 그 칼로 가족들을 마구 쑤셔댔던 아빠.




 


"한번 읽어 보았니?"

"네, 그럼요. 한번 쭉 읽어 봤지요. 띄어쓰기랑 고칠 것도 좀 고치고."

"그래, 다 읽어 봤다는 거지..."




본인의 수십 년 인생을 담은 글을 읽었다는 딸내미의 얼굴을 살펴보며 아빠는 어떤 말을 기다리셨을까. 혹은 기대하셨을까. 정작 나는 읽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아빠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 순간을 모면하기 바빴는데.




뭐가 그렇게 바빠서. 뭐가 중요한데.



"학습자님들이 외롭지 않은 교육을 하고 싶어요.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교육이 아니라 학습자님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가볍게 생각한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마을 어르신들께 시화를 가르치는 몽돌학당 전혜숙 강사님의 말이 떠올랐다.



아빠의 삶을 복기하고 정리하시는 그 과정을 외롭지 않게 해 드려야겠구나, 평생 처음 딸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는 건데, 그 과정을 소중히 다루어야겠다, 지금부터라도,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지나고 나서 또 후회할 뻔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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