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글쓰기 커뮤니티에서 활동합니다.
매일 다른 주제가 주어지면 그것에 대해 씁니다.
‘걱정’이라는 단어만 봐도 약간 더 기운 빠지고 약간 더 의기소침해지며 약간 더 걱정이 생길 것만 같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내게 진정 걱정거리가 있단 말입니까, 솔직히?
집안에 우환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아프셔서 제가 병 간호할 상황, 아직 없네요. 다행히도 양가 부모님 모두 건강 유지를 잘해주시고 계시네요. 아이들도 초등학교 5학년과 고등학생이 되니 쫓아다니면서 챙겨야 할 나이는 지났습니다. 저는 재택근무 중에 이렇게 글도 쓰고 있고요. 몰래몰래 취미 활동도 하고 있네요. 일단 아무도 아픈 사람이 없다는 것, 그렇다면 나머지는 솔직히, 걱정거리가 되려나요? (긁적긁적)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는 있겠네요.
양가 부모님께서 80세가 되셨다. 언제 누가 병나고 쓰러져도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그럴 경우 누가 돌볼 것인가? 국가 경기 상황도 안 좋다. 나는 언제 망해도 자연스러운 회사를 10년째 다니고 있다. 회사가 문을 닫으면 바로 경력 단절이다. 이자율은 높아질 것이고 매달 카드값을 간당간당하게 쳐내고 있다. 아이들은 또 어떤가. 고등학생이 될 큰 아이는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작은 아이도 5학년이 될 거 라 방심할 수 없다. 고학년이라 학습을 신경 써야 하고 사춘기의 시작이다.
음… 폭풍 전야군요. 전시 상황이 임박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저는 ‘지금이 가장 여유롭고 행복한 시기이다’라고 생각해 봅니다. 아니, 실제로 그래요. 무탈한 지금 시기야 말로 정말 감사한 날들이죠. 미래에 대한 생각은 하고 있어야겠지만 손톱 물어뜯고 다리 달달 떨고 있다고 정신 건강에 도움 되는 건 없을 거예요.
세상이 말하는 좋은 엄마 노릇은
여러모로 내 능력을 뛰어넘는 것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 취항에 맞지 않았다.
나는 결국 내가 생각하는 대로의 엄마 노릇을 하기로 했고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아이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난 엄마답게 살려고 애쓰지 않고 그저 나답게 살았던 것뿐이었다. (..)
나는 맘먹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냥 나답게 살기로.
그러자 나이 듦의 무게가 한결 줄어들었다.
사는 게 그렇게 가볍게 느껴졌다.
가수 이적의 엄마로도 유명한 여성학자 박혜란 작가의 말씀이네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을 쓰신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님의 말씀도 들어볼까요?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불멸하기 때문에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고 흙 혹은 나무, 우주의 벌이 되어 어딘가에 영원히 존재하고 있고, 그렇게 원자로 존재하는 동안에 대부분의 시간은 '죽음'의 상태로 지내다가 '삶'의 상태로 지내는 것은 원자가 지구라는 행성에 생명체로 존재하게 되는 찰나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삶을 누리고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되 그 시간이 끝난다고 슬퍼할 게 아니라 더 자연스러운 상태인 죽음으로 옮겨 가는 것이라 여기면 된다.
우리는 원자일 뿐이고, 우리가 사는 시간은 찰나일 뿐이고, 죽음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태라면... 작은 것에 걱정할 시간이,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결론 나네요. 알면서 매일 까먹어요.
미국에서는 아기가 눈에 띄게 비전형적인 생식기를 갖고 태어나서 성 감별 전문가를 호출해야 하는 경우가 신생아 100명 중 1명꼴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굉장히 높죠? 과연 미국만 그럴까요?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일까요? 그 범주는 누가 정한 걸까요...) 저는 성 정체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전형적인 여자입니다. 양쪽 부모가 있는 일반적인 4인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아주 평균적인 나이에 공부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수도권에서 나고 자라고 지금까지 지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서울이나 서울 근교에서 살게 되겠죠. 일반적인 범주를 넘어선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공기처럼 누려왔던 모든 것이 조금씩 인식되네요. 지금껏 아주 편하게 살아왔구나,라고 희미하게 알아가지고 있어요. 사회란 실은 획일화되어 있지 않은데 저는 굉장히 특정 범주 안에서만 지내고 있더라고요. 경제적 어려움, 고통, 죽음은 TV를 틀면 쉽게 볼 수 있어요. 아직까지는 남의 얘기지만 내 얘기는 아니라고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제가 지금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이 참사 438일 만인 2주 전에 겨우 통과되었습니다. 집 아닌 집 – 비닐하우스나 임시 패널로 지은 곳 등 – 에 사는 사람들이 3년 새 4배가 늘었다고 해요. 1년에 버려지는 유기견이 8만 마리라고 하지요. 고 이선균 씨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문화계 예술인들의 공개 지지에 대한 기사는 이슈화되고 있지 않네요. “생명은 그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문장이 허공에 흩어지고 마는 공허한 말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그래서, 저는 제 자신에 대한 걱정이란 마음은 킵해두기로 했습니다. 뭐 나중에 필요할 때 쓰지요 뭐. 지금은 타인에 대한 걱정을 좀 하겠습니다. 걱정이란 말이 무겁게 느껴진다면 ‘신경 쓴다’라고 바꿔보면 어떨까요. '다정함'도 좋겠네요. 서로가 서로에게 신경 쓰는 사이. 사실 걱정이란 말이 그렇게 부정적인 뜻 같지는 않아요. 타인에 대한 걱정은 생각만으로도 얼마나 따뜻하고 안심이 되는지요.
걱정해 줘 난 안 괜찮아 ♬
넌 쉬운데 난 안 되잖아 ♬
제가 좋아하는 로꼬의 ‘not ok’라는 곡이에요. 타인에게 투정 부리듯 나의 걱정거리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나 힘들다, 그러니 걱정해 달라고 응석 부릴 수 있는 것, 서로가 그런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내 걱정은 당신이 해 주고 당신 걱정은 내가 해 주면 좋겠습니다.
다시 주제 < 걱정에 작별 고하기 >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스스로에 대한 '사사로운' 걱정과는 작별을 고하고, 서로에 대한 걱정은 이어가는 사이가 되면 좋겠다... 정도로 오늘의 이야기를 급 마무리 지어도 될까요? ^^;
글 커버 이미지는 유튜버 때잉((73) 때잉 - YouTube)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