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본인도 오래전에 떠난 고향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싶은 꿈을 마침내 실현했고, 겨울방학 마지막 날 “너 내일 전학 간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도 못한 체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났다.
30년 전의 김포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환경의 변화는 쇼킹 그 자체였다. 차를 타고 학교 정문을 들어서는데 남자애들이 보여서 기겁했던 기억이 난다. 반에 들어가니 남자아이들이 앉아 있었고 몇 달간 뒤통수가 근지러워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시험이 끝나면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체벌이 가해졌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심하게 맞았다. 몽둥이가 발바닥을 한대만 강타해도 나는 떼굴떼굴 굴렀고 선생님들은 어이없어했다. 교사와 학생들 간의 폭력문제로 경찰차가 학교에 오기도 했고, 화장실은 툭하면 수도가 끊겼다.
명문여고였던 이전 학교는 화장실이 교실만큼 깨끗했고 나는 겨울에 따뜻한 화장실 라디에이터 앞에 앉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곤 했다.
담임은 반에서 10등까지의 아이들 이름만 기억했고, 그 이하의 아이들은 상담 시 출석부의 이름을 흘깃거리며 대강 상담했다. 일주일에 국영수 문제집을 한 권씩 풀어서 사물함 위에 제출해야 했고, 옆머리는 귀를 반 이상 덮으면 어김없이 잘려 나갔다. 교복 외에도 학교 양말에, 신발에, 아우터에, 가방에, 남자아이처럼 짧은 머리에, 그렇게 똑같이 생긴 수 백 명의 우리들이 있었다.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계도 과정 없이 퇴학이 이루어지고, 공부를 못 한다는 이유로 반 전체가 한 명을 은따 – 은근한 따돌림 – 시켜 전학시켰다. 수년이 지나 왕따라는 것이 이슈화가 되면서 나는 그제야 그때 우리가 했던 것이 왕따임을 알았다.
전학 후 첫 시험을 봐야 하는데 나는 제2 외국어가 바뀌어서 당황했다.
이전 학교에서는 불어를 배웠는데 새로운 학교에서는 일본어였다. 그래서 그냥 교과서를 외웠는데 전교생 중 유일한 백 점이었다. 전교생이라고 해 봤자 대학 진학 반은 문과 반 하나, 이과 반 하나였고, 나머지는 상고 반이었다. 이전 학교에서는 반에서 10등 안팎이라 담임의 관심 외였는데 얼굴 하얗고 공부 잘하는 전학생에게 쏟아진 호기심 어린 관심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 후, 나는 새로운 학교에서의 새 문화에 아주 잘 녹아든 자가 되었다. 성적도 곤두박질쳐 급기야 반에서 꼴찌를 받는 과목도 나왔다. 대입 유망주였던 나의 몰락에 담임은 화를 내며 나를 깡통이라고 불렀다. 내신점수는 엉망이었지만 수학능력평가라는 제도가 날 살렸고 대학에 들어갔다.
부모님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때 그냥 서울에 있었더라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을 거라고 안타까워하셨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에게 거칠고 자유롭고 새로운 환경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가뜩이나 가부장적인 분위기 가정의 장녀인 내가 그 여고를 나와 여대를 가고 – 서울의 그 고등학교는 여대로 많이 진학시켰다 – 맞선을 봐 시집을 가고, 천성에도 맞지 않는 전업주부로 꾸역꾸역 살림을 꾸리고...? 그렇게 20년쯤 살다가 갱년기를 겪으며 어느 날 불현듯 사실은 스스로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에그머니나! 아니, 영원히 나에 대해 모르고 죽었을 수도 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리고 전학을 갔다고 쭉 미끄러진 성적은 그게 실체였던 걸로. 그때까지 나는 교육이라는 체제에 멱살 잡혀 끌려온 아이였지 공부를 제대로 한 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평생 따라온 모범생 이미지가 늘 무거웠던 터였다. 이미지에 그렇게 금이 나면서 나는 스스로와 내 부모를 실망시켰지만 동시에 해방감도 맛봤다.
이후에도 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대학에 진학했고, 동아리 활동을 했고, 점점 더 활동 반경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좋은 대학이 다 뭐람? 남편은 나보다 3살이 많지만 나보다 늦게 대학에 들어왔다. 요즘 우리 나이에, 아니 요즘 세상에 대학 운운하는 거 너무 별로이지 않나요.
아아아.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다. 오늘도 또 미끄덩.
오늘의 글쓰기 주제는 <장소를 통한 치유의 길>이다. (……)
그러니까...... 전학 후 우리는 한동안 주택에서 살았다.
그 봄, 수업이 끝나고 학교 뒷문(쪽문)으로 빠져나와 나 홀로 걷던 오솔길. 아기자기한 들꽃과 나무들, 흙 길과 아스팔트길이 간간이 섞인 고즈넉한 시골길, 15분가량 이어지던 그때의 그 시간이 너무 좋아서 나는 가만가만 걷곤 했다. 다정하고 몽글몽글하고 신비로운 봄 내음에 나는 은은하게 압도되었다. 마치 나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었달까. 사실 그때 아빠가 사업체에 돈을 쓸어다 부어 우리는 누군가가 제공한 임시 숙소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형편없는 곳이었지만 집으로 가는 그 길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생생한 행복으로 기억된다. 나는 내가 그런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난생처음 알았고 여전히 그때 그곳은 내 인생의 모멘트로 기억된다. 이후 우리는 근처 다른 곳으로 이사했고 나에게 그 봄날은 딱 한 계절의 추억이 되고 말았지만.
그로부터 6년 후, 어학연수 차 간 밴쿠버에서 우연히 들어간 숲 속 어느 플라워 가든에서 나는 익숙한 흥분감에 압도되었다.
돈 없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화분 하나 사지 못했지만 울적할 때마다 그곳에 들르곤 했다. 그리고 밴쿠버 시내의 어린이 도서관의 분위기에 홀려 털썩 주저앉은 일은 또 어떻고.
자연환경은 아니지만 30대 때는 일본 다케오시 시립 도서관에서 또 한 번 넋을 잃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집 근처에 어린이 도서관이 생겼다.
직장맘으로서 한창 치열하게 살던 시기, 나는 종종 숨을 쉬기 위해 어린이 도서관에 숨어들었다. 1층 유아실에 주저앉아 마구 쌓아놓은 그림책을 보다 보면 숨이 쉬어졌다.
나는 작년에야 본격적으로 어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동네 작은 도서관, 주민센터 2층 도서관, 알라딘 중고 서점에 가서 숨을 쉰다. 오늘도 잠깐 다녀왔다.
나는 벌써부터 봄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아파트 말고) 탄천 건너 앞 아파트의 숲 속 뷰가 끝내준다. 사람도 없다. 햇살 좋은 날, 나는 나의 최애 자리에 앉아 빵을 뜯으며 책을 볼 것이다. 해의 방향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옆자리로 이동하면서. 큰 아이와의 문제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날, 등교를 하지 않고 있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재택근무 중인 나의 상황을 한탄하며 일이고 뭐고 그곳으로 뛰쳐나갔다. 그곳에서 나무가, 책이, 빵이(?) 나를 보듬어 주곤 했다.
치유의 장소는 생각만 해도 안심이 되고 든든하다. 감격이고 행복이다. 그렇게 나는 앞으로도 호시탐탐 나의 장소로 쏙 들어갈 기회를 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