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딴짓 Feb 15. 2024

여의나루역에서 부모님을 구조해 주신 청년분들께

"내가 이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일상적인 안부를 주고받는 통화 중 어머니께서 망설이며 말을 꺼내셨습니다. 



"구정 직전에 부부 동반 모임이 있어서 서울에 갔었거든. 5호선 여의나루역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거기 에스컬레이터가 아주 깊고 높더라고..." 

"한참 올라가는데 네 아빠가 손잡이도 잡지 않고 서있다가 뒤에 있던 나를 돌아본 거야. 그러다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나한테 쓰러지는데..."



아버지는 뒤에 서계시던 어머니께 덮치듯 쓰러졌고, 이어 도미노처럼 어머니도 뒤로 쓰러졌는데 어머니 바로 뒤에 서 계시던 아가씨께서 안간힘으로 두 분의 무게를 버티셨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아가씨가 좀 더 버티지 못했으면 셋 다 굴러 떨어질 상황이었습니다. 



아버지 위쪽에 서 계시던 청년이 다급히 아버지 손을 잡아당겼지만 쓰러진 아버지(81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고, 에스컬레이터의 한참 위쪽에 있던 청년 한분이 역방향으로 뛰어 내려와 그렇게 두 청년이 간신히 양쪽에서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고 합니다. 에스컬레이터에는 그렇게 세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분들은 부모님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안전하게 내린 걸 확인한 후에도 한동안 곁에서 머물며 괜찮으신지 재차 확인한 후에야 갈 길을 가셨다고 합니다. 



"그때 그 청년들. 커피 값이라도 쥐어 보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 내 뒤에 서 있던 아가씨,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어머니(79세)는 커피를 몇 차례나 언급하셨습니다. 



듣고 있는데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어머니는 명절 때 자식에게 줄초상 치르게 할 뻔했다며, 지금도 그때의 타박상으로 온몸이 쑤시다고 하셨습니다.      



"아니, 에스컬레이터 손잡이를 안 잡으면 어떻게 해!!!" 뒤늦게 역정을 냈지만 사실 저도 손잡이를 잘 잡지 않습니다. 왠지 찝찝한 마음에, 코로나 이후로는 더욱요. 그런데 이런 일이, 게다가 여러 명이 한꺼번에 다칠 수 있는 상황이 충분히 일어나겠구나 싶어 아차 했습니다. 찾아보니 5호선 여의나루역은 지하 5층 규모로,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역이라고 하네요. 그때 어머니 뒤에 서 계시던 여성분께서 손잡이를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노인의 기억이라 도와주신 분들이 청년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신 그 세 분이 제게는 청년이고 영웅입니다. 어머니 뒤에 계셨던 여성 분, 다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제가 하는 SNS 중 텍스트를 활용하면서도 가장 많은 분들께 노출되는 장이 이곳이라 여기에 글을 남깁니다. 그분들이 이 글을 읽으시든 아니든 자식 된 자로서 반드시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분, 정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부모님께서 안전 귀가하셨습니다. 저희 부모님도 이 일로 경각심을 가지게 되셨다고 합니다. 저도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더 잘 챙기겠습니다. 이 일로 제 자신도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를 반드시 잡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주위를 좀 더 살피고, 특히 노약자가 주변에 있는지 한번 더 시선을 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딸 드림. 





 

작가의 이전글 나는 니 엄마가 아니야 - 2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