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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Feb 19. 2024

나는 니가 신경 쓰여

너와 헤어질 날짜를 세고 있는데

이런 것이다. 뭔가를 쓰기 시작하면, 그 글에 관련한 정보와 정보의 원천 같은 것들이 실지로 내 앞에 불쑥불쑥 현현(顯)하는 것이다. 가령, UFO가 등장하는 소설을 한참 쓰고 있을 때 조간신문에 UFO 심층취재기사가 실리고, 그날 저녁 어느 술자리에 우연히 앉게 되면 자신이 UFO를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초면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식이다. 내가 UFO의 U자초차 꺼내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런 것을 두고 신비까지 들먹이면 좀 지나치달 수 있겠으나, 그것이 무엇이든 집중도가 극으로 치닫는 창작에는 일종의 무속(俗)이 스며들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_ 이응준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2023)

 





내게도 이런 일이 상당히 발생한다. 신경 쓰고 있는 어떤 일이 있으면 관련된 책의 어느 문장이 돌연 내 앞에 나타나는 식이다. 필요에 의해서 내가 관련된 책을 찾아 읽었겠지 싶지만 눈을 감고 손을 휘휘 저어 고른 책도 그런 경우가 많으니 참으로 신통방통하다. 아, 물론 자의적 해석이다. 어쨌든 나는 그게 신기하다.





나는 그를 몰랐다. 그가 30년 넘게 시, 소설, 산문, 시나리오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왔고, 그의 장편소설 국가의 사생활은 영국 가디언지가 주목하기도 했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지난주 그의 책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를 상호대차로 받아 보았다. 뭔가 제목이 쾌걸 조로스러워서 마음에 들었다. 책을 받기 전까지는 저자가 누군지도 몰랐다.

쾌걸 조로. 이런 느낌의 옛날 만화인데...




책의 서문만 읽고도 나는 이미 좋아 죽었다. 민음사에서 이 작가의 책을 여덟 번째 냈다는데 작년부터 겨우 독서다운 독서를 시작한 나로서는 알 리가 없었고 나는 이 멋진 작가에 대해 나에게 노티스를 주지 않은 민음사가 잠시 미워졌다가 짐짓 용서하는 척하며 책을 야금야금 읽어 나갔다.




채 몇 페이지 읽지 않아 나는 그가 2016년, 16년간 함께 한 반려견 토토를 무지개다리 건너로 보내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해 유기견 보호소에서 입양한 시츄 한 마리와 - 그 이름도 토토 - 지내고 있음 또한.




나는 군밤이라는 진도믹스를 임시보호 하고 있다. 23일 차. 나는 자신보다 개를 더 사랑하는 저자의 이야기에 반갑고 기뻤다. 조로 느낌의 책인 줄 알았는데 인생 개 이야기가 나와서 미소가 지어졌다. 동시에 나는 멈칫했고 심지어 약간 뒷걸음질 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집은 두 달 한정으로 군밤이가 머무는 임시 숙소이고 두 달 후면 군밤이는 어디론가로 또 보내질 것이다. 23일이 지났으니까 이제 37일 정도 남았다. 군밤이가 또다시 고달픈 떠돌이 신세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누구라도 군밤이를 보면 사랑에 빠질 텐데, 부디 그 기간 안에 좋은 곳에 입양되었으면 좋겠다. 제발. 제발.



    




개 나이로 2살, 사람 나이로 24살, 청년 군밤군은 알고 있다. 내가 자신의 먹고 싸는 과정의 대부분을 전담하지만 그다지 다정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무료해진 시간에 시무룩해지면 한 두 마디 걸기도 하지만 그뿐이라는 것을. 가끔 신이 나서 겅중겅중 손발을 들거나 다정히 핥으려고 해도 허용하지 않는 것을. 누울 자리 보고 발을 펼 줄 아는 군밤이는 그래서 나에게 함부로 다가오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조용히 지켜볼 뿐이다. 군밤이는 분명히 알고 있다.


 

재택근무 중인 나의 컴퓨터방 앞에서 잠을 자고



자신과 썩 친하지 않은 고등학생 큰 아들에게 혼내듯 짖어댄 후 "나 잘했지? 한번 쓰다듬어 줘요"라고 내 앞에 척 앉을 뿐이다.



그리고 셋이 산책하다가 내가 사라졌을 때 같은 자리에서 20분간 움직이지 않으며 나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뿐이다.






대단한 인류애도, 동식물 사랑도 없는 내가 군밤이를 임보 하게 된 것은 연 8만 마리나 된다는 이 나라의 유기견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과,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은 약간의 기대감에서였다. 그러니까 반려견 훈련사 강형욱이 말한 '이런 사람은 절대 개를 키우면 안 된다'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확신이 없는 사람. 가족이라는 책임이 없는 사람.



군밤이와 함께 하면서 과거 두 아들의 육아로 고군분투하던 시절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나는 물고 빠는 엄마가 아니었다. 가슴형 엄마지만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을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금, '해야 돼서 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군밤이를 대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볼 때마다 '역시 그랬군' 싶어 픽 쓴웃음이 나온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단도리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재발견은 아니다. 군밤이는, 그 깊은 눈동자는 이런 나를 다 알고 있다.



군밤이의 임보 기간을 연장하거나, 아예 입양해도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섬세하고 속 깊은 개인 군밤이라고 할지라도 직장맘으로 이미 정신없이 살고 있는 내가 이 아이를 전담하는 상황은 감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 변명이다.)



하수구에서 태어나 구조된 후 이곳저곳 임시 거주지를 전전했던 군밤이는 상처받은 영혼 상태라고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의연하고 우리 가족에게 큰 사랑을 주고 있다. 하루 만에 우리 가족에게 마음을 주었던 (큰 아이 제외)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눈칫밥을 많이 먹은 탓일까 싶어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인간 외에 타 종에 대해 내가 가졌던 막연한 생경함과 편견이 군밤이로 인해 많이 흐릿해졌다. 그 시작이 군밤이가 되어 주어서 참 고맙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이 착한 생명을 품을 마음의 여력이 없구나, 싶어서, 그렇게 내 한계를 보는 듯 싶어 기분이 깔깔해진다. 두 달이라도 긴급 돌봄을 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지 뭐,라고 생각하려고 하지만 지나가는 날짜를 셀 때마다 조금씩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고 흐렸는데 내일은 날씨가 어쩌려나.

내일은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군밤군은 푹신한 풀 위를 걸으며 냄새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물에 흠뻑 젖어 푹푹한 땅은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밤이와의 23일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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