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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딴짓 Nov 28. 2023

혹시 잘 헤매시는 분? (ft. n번째 분실)

헤매기의 허용


또 지갑을 잃어버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n번째라고 해 둘까?



나는 다방면으로 많이 헤맨다. 내비게이션을 손에 들고도 길을 헤맨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으로 머릿속은 늘 복잡하다. 내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급 발진과 후퇴를 반복하고 있으니 그 또한 헤맨다는 표현을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으려나. 그런데 막상 이렇게 글로 내뱉고 나니 기운이 더 빠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종이를 꺼내 ‘헤매도 좋다’라고 크게 쓴 후 ‘좋다’라는 글자에 유난스럽게 동그라미를 덧칠해 본다. 별표도 한 개 친다.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책 <도둑맞은 집중력>의 저자 요한 하리에 따르면, 멀티태스킹이란 것은 불가능하며 다만 빠른 속도로 작업을 전환할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을 전환하는데 에너지를 쓰느라 실수가 잦고, 덜 창의적이며,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평균적인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신이 근무시간의 40퍼센트 동안 멀티태스킹을 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3분마다 주의가 분산된다는 것! 이 부분을 읽고 나는 유레카를 외치며 동시에 절규로 무릎을 꿇었다. 두 아이와, 가사와, 내 업무까지 (그리고 이렇게 글까지 쓰면서). 멈추지 않는 프로펠러 같은 삶이 큰 아이를 출산한 16년 전부터 가속화되었다. 그 세월 동안 분 단위로 깨져왔던 나의 집중력. 나는 더 이상 나의 실수에 대한 죄책감을 갖거나 희화화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잘 흘리고 어수룩하고 헤매며 살아왔는데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무탈했다.

내가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가족이, 친구가, 동료가, 이웃집에서 도와주셨다. 조금 힘든 일이 있어 단체 톡방에서 말없이 있으면 가타부타 묻지 않고 문 앞에 씩씩하게 생긴 화분 하나를 놔두고 도망가는 동네 친구가 있었고, 남자 셋이 꼴 보기 싫어 밥 해주기 싫다고 분통을 터트리니 정성스레 담은 반찬과 국을 경비실에 두고 홀연히 사라진 여인도 있었다. 그녀 또한 밥 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스트레스라고 울부짖곤 했는데도. 인간관계가 다양한 것도, 다른 사람을 잘 챙기는 성격도 아닌데 그렇게 나에게는 고운 손길이 많았고 나는 ‘살면서 운이 좋았다’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고백하건대, 나는 20대 때도 꽤 헤맸다.

20대 중반에 나 홀로 브라질 여행을 감행했다. 30시간 비행의 중간 경유지인 미국 공항에서 뜬금없이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미즈 초 헤 용. 미즈 초 헤 용.” 이후 내용은 당장 출국 카운터로 오라는 내용 같았다. 헐레벌떡 뛰어가니 엄숙한 표정의 직원이 나를 응시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가 공항 어디선가 여권을 흘린 지도 몰랐다. 그녀는 내게 여권 안에 절대로 현금을 넣어두지 말라고 강조했다. 당시 나는 여행 경비 일체를 여권 안에 소중히, 덜렁덜렁, 넣어뒀었다.







나는 내년 5월에 떠날 나 홀로 아이슬란드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설마 20년 동안 조금은 더 야무져졌겠지 싶지만 상대는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나라이며 멍 때리면 코 베어 간다는 유럽이다. 정류장을 찾지 못해 헤맬 지도 모른다. 브라질 여행 후 20년만큼 늙은 체력 때문에 더 헤맬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사실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뭐 어떻게 되겠지. 뭔가 잘못되면 좀 돌아가지 뭐. 위험한 상황은 조심해야겠지만 그 외에는 상황에 따라 대처해 봐야지 별 수 있는가. 혹시 아는가. 어느 친절한 아이슬란드인이 불안한 나의 파동을 감지하고 다가올 지도(아이슬란드는 인구 37만 명의 작은 나라라 길가에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5000만을 넘는다.).




실은 비행기 표만 덜렁 끊어 놨다.

최근에 또다시 찾아온 안개 같은 우울의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여행을 가겠다고 마음만 먹고 진전되는 게 없다 보니 다시 의기소침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동네방네 소문을 내 본다. 가자, 진짜 가는 거야. 나 혼자!




결론적으로, 나는 헤매는 내 모습에 때로는 불같이 화가 나고, 더러는 그럭저럭 괜찮기도 하다.

허둥대는 내 모습에 포기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때로는 헤매다가 의외의 재미있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특히 엄마라는 위치에 있으면 헤매면 안 되는 일이 많다. 아니, 헤매면 절대 안 되는 것만 같다. 엄마로서 부족한 내 모습에 짜증 나고 좌절될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엄마라는 타이틀을 떼고, 내 나이도 떼고, 자유롭게, 제대로 헤매기 위해 아이슬란드로 갈 것이다. 그 속에서 내 안의 야성을 되찾고 내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도 기억해 보련다. '이 나이에 헤매면 주책 아냐?'라는 내 안의 소곤거림은 못 들은 척하고 '이쪽에서 헤매면 헤맬수록 저쪽에서 다른 문이 열린다' 말을 곱씹으면서.




김영하가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의 시찰리아 섬을 여행하며 쓴 책 [오래 준비해 온 대답]의 한 구절을 적어본다.


"부인, 천천히 하시지요, 날이 덥습니다."
흰 양복을 입은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아내와 나는 힘든 일을 당하며 낙심할 때마다, 혹은 당황하여 우리 중 누군가가 허둥댈 때마다 그 멋쟁이 사장의 느긋한 대사를 서로에게 대해주었다. 이탈리아어 원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 산뜻한 표현이 된다.

"Senora, Prego. Ecaldo."

우리는 마법의 주문처럼 이 말을 외우고 그럴 때마다 거짓말처럼 다시 인생에 대한 느긋한 태도를 되찾을 수 있었다.



위의 말이 “It’s okay. Why not? Fear for what? (괜찮아. 뭐 어때? 뭐가 두려워서?)”처럼 들리지 않는가?





수시간만에 지갑을 찾았다. 책상 밑에서. 지갑을 건네주기 전 남편은 내 목을 졸랐다. 컥컥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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