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전 우리 아이들의 초등학교 입학식 날 만났다. 아파트 단지 내 슈퍼에서였다.
“어! 쟤 우리 반인데.”
그 집 아이가 먼저 알아보았고, 나는 의례상 목례를 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저희 집에서 커피 한잔 해요.”
갑자기?
그러나 10년 전의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유두리가 없었고 안 갈 핑곗거리를 대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그녀를 따라나섰다. 엄마들은 원래 이러나? 머리로는 계속 ‘부담스럽다’는 말을 되뇌고 있었다. 이사 온 지 1년 차, 동네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고, 퇴근 후 여덟 살, 세 살 두 아이의 저녁식사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나의 매일은 전쟁이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리네! 말 놓을게요. 언니라고 불러요!”
만난 지 30분 만에 내 나이가 털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언니라고 부르라는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시 10년 이상 상사이자 절친으로 지내온 이에게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는 자였다. 깍듯하게 존칭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회에서 만난 이와 금세 언니 동생이 되는 게 나는 영 어색했다. 호칭으로 인해 갑자기 확 당겨지는 거리감도, 야릇한 서열도 싫었다. 호칭은, 호칭만 그랬다. 회사에서는 이름과 직함으로 불렸고,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주변 엄마들과 딱히 교류가 없었기에 더 어색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나의 언니가 되었다.
재미있는 우연이자 엄청난 인연이었다.
우리는 이름만이 아니라 성까지 같았다. 아파트 같은 동의 위아래층에 살고 있었다. 우리의 아이들은 절친이 되었다.
“쌀이 똑 떨어졌네. 쌀 한 그릇만. 지금 가지러 가도 되지?”
남편과 나는 얼굴에 ‘내향인’이라고 쓰인 자들이었고, 그녀는 우리의 삶에 말 그대로 불쑥 등장했다. 많이 부담스러웠지만 딱히 거부할 수도 없었다.
돌봄 교실. 방학 중에도 아이를 학교에 맡길 수 있는 장치. 그러나 입학 전인 2월에 이미 신청을 받았다는 걸 까맣게 몰랐던 나는 여름 방학이 다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고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오후에는 학원을 보낸다고 쳐도 오전 시간이 문제였다. 여덟 살 아이를 오후 2시경까지 혼자 두기는 어려웠다. 바로 몇 달 전까지 육아휴직을 썼기 때문에 휴직이나 단축 근무를 신청하기도 눈치 보였다. 그 시절은 더 그랬다.
“걱정하지 마. 내가 OO이 점심 먹이고 학습지 풀려서 학원 보낼게.”
너무 고마웠지만 방학은 장장 한 달이나 되었다. 남편과 나는 고심한 끝에 다른 애매한 선물보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사례비를 전달하기로 했다. 큰 금액도 아니었다.
“너 장난하니? 웬 봉투야?”
언니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언니는 내가 자신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여겼다며 노여워했다. 당황스럽기는 나도 매한가지였다. 내 입장이라는 것도 있는데, 한 달이라는 긴 기간 동안 덜렁 아이를 맡길 때의 내 불편한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이 내심 서운했다.
그렇게 언니는 방학 내내 자신의 두 아들과 내 아이까지 셋을 먹이고 씻기고 공부시켰다.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이 혼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에게만 호의를 베푸는 자가 아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으면 손을 내밀었다. 동네에서 싸우는 애들이 있으면 가서 억울한 양쪽 아이들 말을 다 들어주고 혼도 내고 달래기도 해서 집으로 보냈다. 어두운 데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학생에게 다가가 담배 그만 피우고 얼른 집에 가자고 한마디를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진정한 오지라퍼였다. 반면 자신이 호의를 받는 것은 유독 쑥스러워했다.
“언니! 속도 좀 줄여줘요! 사고 나겠네!”
어느 날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중년의 여성 운전자에게 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 나는 깔깔 웃었다. 아, 저 놈의 언니 소리.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시절이었다. 퇴근시간에 갑자기 회의가 잡히는 게 당연한 듯 여겨지던 분위기였다. 본인 회사에서 집이 코 앞이었지만 남편은 절대 내 편의를 봐주지 않았다. 아이들 걱정에 회사에 대한 원망, 남편에 대한 원망까지 나는 자주 발을 동동 굴렀다.
“언니…”
마음이 아득해지고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면 나는 종종 회사에서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김치찌개 끓여놨어. 퇴근하고 우리 집으로 바로 올라와. 애들은 내가 챙기고 있을게.”
“언니는 내 말도 안 들어보고… 언니가 내 엄마야? 언니 뭐야…”
괜스레 볼펜 소리를 하고 전화를 끊은 후 화장실에 들어가 펑펑 울었다. 언니는 ‘언니’하고 부르는 내 목소리만 듣고도 알았다.
그 시절 나를 살린 것은, 내가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친정이나 남편의 도움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겨우 두 살 언니인 그녀 덕분이었다. 나의 덤벙대는 모습은 언니의 날카로운 레이다에 자주 걸렸고, 언니는 나와울고 웃어 주는 존재였다.
그렇게 큰 아이의 저학년 시절이 무사히 지나가고, 6년 전, 언니는 차로 1시간 거리의 인근 신도시로 이사를 갔다. 우리는 그 후에도 종종 만나고 있고, 언니는 이제는 고등학생인 내 아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민을 들어준다. 언니의 큰 아들은 어느덧 6개월 후면 군 제대를 한다.
작년에 나는 독서 모임과 글방 활동을 시작했고 그렇게 읽고 쓰는 자가 되었다.
언니를 만나면 여전히 편하고 반갑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대화가 아이들, 남편, 먹고사는 이야기, 월급, 직업 같은 이야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조금씩 느꼈지만 갈수록 더 그렇다. 나는 책, 글, 꿈,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지금 이 나이에 뭘 배우겠어.”
아이들이 다 커서 심심해 죽겠다는 언니의 말에 나는 책도 읽고 하고 싶은 것도 해 보라는 말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시답잖다 는 반응이었다.
“놀러 나 가자. 여행 가서 맛있는 거 먹자.”
“에이 그러자!”
언니를만나고 오는 길, 멀어지는 차를 보면서 열심히 손을 흔들었지만 돌아서며 쓸쓸한 마음이 훅 몰아쳤다.
슬프구나. 나 지금 슬프네.
글을 쓸 때의 내 모습도 나이고, 그렇지 않을 때의 내 모습도 여전한 나이다. 그러나 어느덧 읽고 쓰는 것은 내 삶에 절대적인 의미가 되었고, 그를 통해 연결된 인간관계도 큰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언니와 큰 부분을 공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슬픔이 몰아쳤다.
“넌 무섭지도 않니?”
아이슬란드의 도서관에 가서 그림책 발표를 한다고 하자 언니는 의아함과 걱정스러움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게 날 이해도 못하면서 가서 물가 비싸다고 괜히 배 곪지 말라며 돈 봉투를 건네는 이상한 언니.
이 글을 쓰는데 갑자기 언니가 해주던 수많은 음식이 떠올랐다. 바삭바삭한 수제 돈가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언니 표 마늘 빵, 돼지고기 숭덩숭덩 매콤 김치찌개, 김장하던 날……
“언니…”
전화를 했다.
“무슨 일 있니?”
오늘도 역시 대단히 언니인 척을 한다.
“아니… 그냥… 갑자기 예전에 언니가 우리 OO이 돌봐줬던 거 생각이 나서… 언니가 그때 다 먹이고 재우고 그랬잖아… 언니 덕분에 내가 회사 생활 할 수 있었잖아… 그런데 정작 나는 언니 큰 애 사춘기로 힘들어했을 때 그것도 모르고… 지금 OO이 사춘기 지내면서 보니까 언니가 그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언니한테는 의지할 언니가 없었잖아 엉엉…”
나는 내 말에 취해 꺼이꺼이 울었다.
“아이고, 얘가 새삼스럽게. 아니야, 그때 내가 OO이 챙겼던 건 내가 좋아서 한 거야. 내가 오지라퍼잖아, 깔깔깔~~~”
“그리고 큰 녀석 이야기 네가 많이 들어줬어. 들어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이 풀렸는데.”
언니의 토닥거림을 받고 전화를 끊었다. 더럭 겁이 났는데 우리 언니는 거기 그대로 있었다. 나도 언니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다행이야. 진짜 다행이야.
꼬부랑 할머니가 된 우리를 상상하면 웃음이 난다. 나는 둘 중의 한 명이 저 세상으로 가기 전까지 우리의 인연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안다. 언니가 없는 나와 동생이 없는 그녀의 인연.
나는 이따금 이 책 엄청 재미있다며 언니에게 책 한 권을 쓱 내밀 것이다. 요즘 뭐 할 때 기분이 좋냐고 한 두 마디 던질 것이다. 해보고 싶은 거 없냐고 은근슬쩍 물을 것이다. 언니가 내게 먼저 손을 내민 자였으니 나는 그렇게 옆구리를 찌르는 자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