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너네 할머니께 나연이는 호주로, 지연이는 미국으로 가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얼마나 마음이 먹먹해졌는지 몰라. 너네 자매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으니까.
경기도 외곽의 작은 시에서 나고 자란 세 살 터울의 너희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지. 엄마는 공장일로 바빴고, 아빠는 이 나라에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며 동남아 어느 나라로의 이민을 준비했지만 여의치 않았어. 한창 잘 먹고 지원을 받아야 할 너희들의 십 대 시절, 집에 들어가면 밥이 없었고, 부모들은 문제집을 사 줄 여유도 없었어. 결국 너네 자매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중학교를 다녔지. 그 시절, 시골 아이들의 횡포로 왕따를 당한 지연이가 직접 학교에 항의를 하고, 할머니가 학교에 달려가 부모들을 꾸짖었다는 것을 고모는 얼마 전에야 듣고는 깜짝 놀랐어. 늘 온화하신 할머니나, 지금도 고등학생같이 앳된 외모의 지연이가 그렇게 당찬 행동을 했다는 것에 말이야.
나연아. 너는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학업에 매진했고, 연예인들이 많이 간다는 예술대학교에 입학했지. 3년의 학업을 마치고 졸업 전 일자리도 얻었고. 그 무거운 방송 장비를 이고 지고 몇 날 며칠을 고된 밤샘 촬영 일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할머니께 전해 듣고는 얼마나 기특했는지 몰라. 대학교 때에도 여러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야무지게 살아온 너였는데, 사회에서의 고된 노동과 적은 임금에 너는 녹초가 되어 갔어. SBS 방송국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이야기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몰라. 그리고 몇 년 후, 너는 제2 금융권의 홍보 팀으로 이직했지. 이전과는 급이 다른 편안한 근무 환경과 쉬운 업무가 주어졌어. 40만 원짜리 월세에서 시작해 작년에 전세 계약을 했다고 해서 이제 한숨 돌렸구나, 싶었는데… 서울에서도 주요 대학교인 어느 학교의 대학원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몇 달 전 전해 들었지. 여전히 참 열심히 사는구나, 싶었어. 그런데 엊그제 추석에 할머니께 갔다가 네가 몇 년 후 미국으로 넘어갈 준비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모는 생각이 많아지더구나.
그냥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역시 여자애라 야무지다’고. 욕심 많은 아가씨라고. 그래, 고모도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런데 고모는 자꾸 나연이의 지난 삶을 걱정스레 더듬게 돼. 혹시 너의 실무 능력과 무관하게 직장 상사가 너의 3년제 전문 대학교 학력을 슬쩍슬쩍 문제 삼진 않았는지, 비교하진 않았는지, 혹은 너의 동료가 그러지는 않았는지. ‘다 좋은데 학력이 아쉽다’라든가, ‘그래도 4년제는 나와야 하지 않나’라는 말을 충고랍시고 툭툭 내뱉진 않았는지. OECD 40여 국가들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거의 1위에 가까운 이 나라의 변치 않는 현실을 너 또한 정면으로 맞닥뜨린 건 아닌지. 그래서 또다시 학업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는데, 결국은 그 비뚤어진 운동장을 벗어나기로 결정한 게 아닌지. 그런 게 아닌지. 너는 그냥 설레는 꿈을 찾아 당차게 떠나는 건데 고모가 쓸데없이 어두운 소설을 쓰고 있는 거라면, 그러면 이 이야기는 그냥 잊어주라.
지연아. 세 살 많은 언니를 롤모델 삼아 언니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거고, 돈도 많이 벌 거라고 말하며 눈빛이 반짝이던 네가 생각나. 실업고등학교에서 회계를 공부하면서 기업체 채용이라는 바늘구멍을 향해 달려가던 너였는데, 갑작스레 실업고 학생을 대상으로 하던 대기업의 필수 채용이 없어지며 고3이던 너는 크게 주저앉았지. 매일 울면서 학교를 다니던 중 우연히 학교에 붙은 공문을 봤다지. 그리고 놀랍게도 너는 하사관, 즉 직업군인에 도전했지. 체육인과 전혀 무관한 작은 체구의 네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체력을 기르며 라이트급 유도 선수 같이 변하는 모습은 정말 놀라웠어. 그리고 할머니 집 앞의 아무 미용실에나 들어가 짧은 단발로 머리를 자르고는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던 그날의 너... 너는 행정 업무에 지원할 예정이었지만 일반 군인처럼 훈련소 등의 과정을 똑같이 통과해야 했지. 25 킬로그램의 군장을 메고 20킬로미터를 행군해야 하는 훈련소 시절, 너는 시간이 되면 공중전화를 붙들고 엄마가 아닌 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대성통곡을 했다지. 그렇지만 매번 돌아오는 답은 ‘네가 선택했으니 끝까지 열심히 해야지 어쩌겠니’였고.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면서 함께 지원한 동기 여학생들이 죄다 중도포기하고, 결국 너와 네 동기 하나만 남아 서로를 의지하며 부대 생활을 시작했지.
그러던 어느 날, TV에서 뉴스가 시끄러웠어. 육군 여성 하사관에 대한 성폭행 사건 및 군인아파트에서의 자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 극단적 선택 전 그녀는 사방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고립된 부대 안에서 그 누구도 그녀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어.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저 뉴스를 보며 얼마나 힘들까. 막연하게 걱정만 하다가 나는 금세 또 잊고 말았어. 그리고 이후 할머니께 들어서 알았지. 그 시절, 너와 같은 방을 쓰던 그 동기에게도 성희롱 사건이 있었고, 이후 힘겨워하던 그녀를 대신해 네가 부대 이동을 신청했다는 걸. 그렇게 결국 둘은 다른 부대로 이동했고. 피해자가 피해야만 하는 예외 없는 현실이었어. 감히 당시의 네 삶에 대해 ‘고생했다’라고 한 마디를 덧붙일 수 있을까. 그렇게 가뿐하게. 이제 겨우 스무 살 초반. 꿈을 향해 험난한 역경을 헤치고 들어간 곳. 그곳에서 너희 둘은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 너는 3년을 버텨냈어. 그리고 그곳에는 희망이 없다며 전역을 했지. 몇 달 전 우리가 다시 만난 날, 너는 선 넘는 남자 사병들의 태도에 대한 얘기를 꺼내다가 그만두었지. 남자라면 지긋지긋하다는 한 마디만 하고는 쓴웃음을 짓고 입을 다물어 버렸어. 군복을 벗은 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간 고등학생의 외모로 돌아와 있었어. 대학교 편입을 준비한다고 들었는데, 엊그제 할머니께 갔다가 너 또한 언니처럼 외국행을 준비 중이라는 말에, 게다가 미국행을 계획 중이라는 말에, 고모는 아무 말도 덧붙일 수가 없었어. 축하한다고 해야 할까.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지난주에 ‘한국이 싫어서’라는 영화를 봤어. 주인공 계나의 모습과 너희 자매의 모습이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가슴이 아려와. 사실 너네가 직장을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깝다 이 아이들.’ 그렇게 자신의 꿈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러면서 현실에 주저앉혀질까 봐, 고모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미래를 그리며 혼자 불안해했어. 한국은 쉽지 않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러니 차라리 잘 된 걸까.
한국에서는 수도권 대학 나온 애들은 지방대 나온 애들 대접 안 해 주고, 인서울대학 나온 애들은 수도권 대학 취급 안 해 주고, SKY 나온 애들은 인서울을, 서울대 나온 애들은 연고대를 무시하잖아. 그러니까 지방대 나온 애들, 수도권 나온 애들, 인서울 나온 애들, 연고대 나온 애들이 다 재수를 하든지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아마 서울대 안에서는 법대가 농대 무시하고 과학고 출신이 일반고 출신 무시하고 그러겠지. 그런데, 그 근성 못 고치면 어딜 가도 똑같아. 호주에 와서 교민이 유학생 무시하고 유학생이 워홀러 무시하는 식으로 이어져. 그 근성 고치려면 자산성 행복을 좀 버리고, 현금 흐름성 행복을 찾아야 해.
_《한국이 싫어서, p186》
몇 달 전 고모는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다녀왔어. 실은 도망가듯 간 거였는데... 호스텔의 룸메이트는 미국인 여자였는데, 미국에서 자기 주위의 한국 여자들은 ‘too much overqualified(과하게 자격을 갖춘)’라고 하더라. 이미 실무 능력이 뛰어난데도 끊임없이 학위를 쌓고 자격증을 따내면서 스스로에게 엄격한 기준을 세워 몰아간다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어. 나는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지. 동시에 어떤 해명이라도 하고 싶었어. 대한민국에서의 남녀 임금 차이 및, 사회에서 픽업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수박 겉핥듯, 그렇게 한 두 문장으로 말해주었어.
너네들과 고모의 인연은 10여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 20여 년 전, 우리 아빠와 너희 할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말이야. 너에게는 없던 고모가, 나에게는 없던 조카들이 생긴 거야. 하지만 그뿐이었어. 나는 신경을 쓰지 않았어. 어차피 친 조카도 신경 쓰지 못하고 사는 일상이니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너희들이 생각났어.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아직 비장하지 않아도 될 나이 같은데, 아직 발랄한 청춘을 보내도 되는데, 그 대신 십 대 때부터 생존을 신경 쓰고 있는 너네가, 그렇게 야무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 자꾸 생각이 났어.
여행은, 18일이라는 아주 길지도 않는 기간이었어. 거기에는 너희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이 배낭 하나 매고 와서는 일하며, 여행하며, 경험하며, 그렇게 자신의 삶을 일구어 내고 있었어. 중국이나 일본에서 혼자 온 여성 청년들도 있었어. 그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삶이란 결국 온전한 독립을 향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라고 말이야. 나라는 존재로 제대로 서는 것. 그렇게 몸과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그 문장들이 가슴에 스며들었어. 그러한 생각과 동시에 나는 아직 독립하지 못한 존재라는 자각이 나를 깨웠어. 그래서 고모는 독립을 결심하게 되었어. 사십 대 중반에, 아직 십 대 아들 둘이 있는 아줌마가 참 뜬금없지? 그래, 그렇지만 고모는 다시 아이슬란드로 가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고모도 준비 중이야. 재정비해서 몇 년 후 다시 가려고. 한국에 머무르지 않으려고. 매일 조금씩 영어 공부도 하고, 가서 단기로 일도 해보려고.
나연아, 지연아.
아이슬란드에서 많은 청년들을 보며 너네가 생각났어. 나연이와 지연이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다면. 아니, 조금 더 밝은 미래의 청사진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조금 다른 한국의 여성상을 보여주었더라면, 그랬다면 너희에게 약간의 힘이 되었을까. 그러나 고모로, 20년 일찍 태어난 어른으로, 이 나라의 여자 선배로 나는 너네에게 아무것도 되어 주지 못했구나.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라는 말과 함께 소액이 든 봉투를 내밀자 눈시울이 벌게 지던 우리 나연이. “사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막막해요”라고 덤덤하게 얘기하던 둘째 지연이.
얘들아, 너희는 이미 너무나도 훌륭하게 살았구나. 이제 연고도 없는 외국으로 떠나 다시 시작해 보겠다는 우리 조카들. 고맙고, 미안해. 그리고 열렬히 응원해. 나는 우리의 인연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너희에게 고모가 있다는 것, 잊지 마. 여기에서 나도 내 삶을 잘 살고 있을게. 그리고 언제나 너 자신을 중심에 세우길,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길, 반드시 그러길 바라.
참적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감히 나는 말하지 못하겠다. 조금 헤아려 보려는 시도만으로도 슬픔과 분노를 도무지 참아 낼 수가 없다. 다만 그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바를 종합하여, 한국인이 한국을 등진다는 말이 틀렸음은 단언할 수 있다. 오히려 한국이 한국인을 나가라고 등 떠미는 상황이다. 마침내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실은 한국이 떠나라고 부추긴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이렇게 말한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그녀에게 인내심이 부족하다느니, 고생을 덜 해 봤다느니 식의 비난은 하지 말자. 돌고 돌아 결국 자기 계발로 귀결되는 꼰대의 무의미한 언사는 이미 차고 넘친다.
_《한국이 싫어서, p192》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너무나도 상투적이지만 정성스럽게 이 말을 내뱉고 싶다. 나연아, 지연아, 너네는 혼자가 아니야. 매일같이 기도하고 있는 할머니가 계시고, 할아버지도 응원하고 계시고, 여기 고모도 있어. 사랑한다, 어느 날 내게 온 선물, 우리 조카딸님들. 귀한 사람들아. 언제나처럼 각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겠지만, 주위를 돌아봤을 때 거기에 고모도 있도록 노력할게. 여기에서 나도 나를 잘 지키고 있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