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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벌거숭숭이 Nov 18. 2024

처음 온 영해면이 낯설지가 않다

경북 영덕군 영해면 뚜벅이마을 입성기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굉장히 예민한 나는 낯선 곳에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밤잠을 설치곤 한다.

아무리 마음을 비우려고 해도 몸은 충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지.

그래서 미리 낮잠을 잤다.

꽤나 치밀한 준비였다.

늦게 잠들어도 일찍 일어난다.

출발시간까지 여유롭게 있다가 급하게 나왔다.

버스 출발 5분 전 나가는 허당끼 있는 모습으로 집에서 출발했다.

아침의 버스는 여유롭고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행히 버스를 놓치지 않고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로 무사히 도착했다.

늦지 않은 나 자신 기특하다.

노포동 부산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경주, 포항행 버스 기다리기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직행으로 가는 버스가 없다.

포항터미널까지 갔다가 영해면으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타야 한다.

포항터미널까지 가는 버스표를 어제 티켓팅했는데, 나를 포함해 4 좌석이 선택되어 있었다.

여유롭게 갈 수 있겠다는 내 예상과는 달리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짐이 많았던 나는 옆자리에 두었던 나의 짐들을 한 아름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경주를 경유해서 가는 시외버스였다.

코로나 시기에 모든 사업에 위기가 닥쳤다.

그중에 하나로 관광버스회사를 예로 들 수 있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이고 질병을 예방하는 것으로 집콕이 대세였던 시기다.

당연히 여행은 금기시되고, 버스 회사의 경영에 위기가 닥쳤을 것이다.

모두가 힘들었던 시간이다.

그래도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온 사람들, 회사들을 직접 보니 마음도 뭉클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시외버스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한 오늘이다.

포항터미널 화장실에는 휴지가 없습니다

포항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역내에 식당들이 즐비해 있었다.

급식실에서 맡았던 대량조리 음식냄새가 온 길가를 장악했다.

생각보다 작은 터미널을 구경하다가 미리 결재한 내역을 들고 매표소로 가서 종이 승차권을 받았다.

늦지 않게 모든 일을 처리했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다가 겉옷을 두고 내린 사실을 깨달았다.

짐을 이고 지고 부랴부랴 버스 회사 사무실을 찾았다.

먼저 눈에 띄는 회사로 들어가 11시 부산발 버스에서 외투를 두고 내렸다고 말했다.

여기는 금아회사니 알 수가 없다는 답변.

당황할 새 없이 바로 천마회사를 찾아갔다.

버스터미널이 작아서 다행이다.

금방 천마 버스 회사를 찾아서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무사히 옷을 찾을 수 있었다.

실수는 있었지만, 여유롭게 시간을 둔 덕에 금방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예측불가의 사건 덕분에 점심은 걸렀지만, 외투를 잃지 않은 것은 좋은 일이다.

영해면으로 가는 바닷길이 아름답다

버스 안은 어르신들로 가득했고, 좁았다.

캐리어를 들고 왔어야 했나, 하는 후회감이 밀려들어왔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가방이 커질수록 불필요한 짐이 늘어난다.

그리고 이 복작복작한 시간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

사람들이 농사를 짓는 논밭을 지나 어느덧 풍력발전소가 보이고, 곧 바다를 만날 수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동해바다는 고요하고 깊어 보였다.

익숙한 바다라도, 장소를 달리 해서 보니 또 다르게 느껴졌다.

앞으로 10일은 이 깊은 동해바다를 마주할 것이다.

반갑다. 동해바다야.

영해 터미널에 내려서 도보로 5분.

쉽게 10일간 묵을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뚜벅이 마을의 대표숙소 덕스

1층에는 귀여운 무인 굿즈샵이 있다.

옆으로 돌아가면 2층으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2층이 바로 게스트하우스 덕스다.

현관문은 열려있었고,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제비 뽑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뽑은 종이에는 6-3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바로 6인실의 3번째 침대라는 뜻이다.

2층 침대의 2층이 내 2주간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1층이 아니라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 덕에 처음으로 2층 침대에서 자보는 거니까, 나쁘지 않다.

사물함이 있어서 금방 짐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어색한 시간들이 시작된다.

처음이라서 당연한 시간들.

모르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없던 용기가 생겨난다.

자연스럽게 어디서 왔는지를 묻고, 오늘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부산에서 출발한 나는 서울, 성남, 충남 아산, 천안에서 온 사람들에 비해 짧은 이동시간이었다.

역시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동서울 터미널에서는 4시간 이상이 소요되고, 충남에서 오신 분들은 대전까지 가서 동대구를 거쳐 영해면까지 오는 긴 여정이었다.

부산에서 경북은 가까운 거리였구나, 새삼 깨달은 순간이다.

도시탈출클럽 프로그램과 웰컴키트는 유용하다

모임시간은 오후 3시였지만, 계획은 계획일 뿐, 변수는 늘 함께한다.

3시 30분에 사람들이 얼추 모여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주어지는 웰컴키트는 마음을 풍요롭게 만든다.

생각보다 짱짱한 모자는 예정된 트레킹을 완벽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10일간의 일정을 대략적으로 설명 듣고, 자연스럽게 자기소개의 시간을 가졌다.

3 단어로 자신을 소개하기.

5분이라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솔직 담백하게 자신을 표현해 냈다.

짧은 시간에 사람들을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내 옆자리에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의 소개를 기억하고 있다가, 오늘 받은 티셔츠와 숙소에 있는 펜을 내밀었다.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그림부탁을 멋진 실력으로 완성해 주셨다.

첫날부터 나만의 티셔츠를 손에 넣었다.

용기가 나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든다.

좋은 시작이다.

덕스는 작은도서관을 운영중이고 일단 웰컴 식사가 풍요로웠다.

숙소의 거실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제법 볼만한 책들이 많았다.

말 그대로 작은 도서관이지만, 재미있는 책들이 많이 있다.

이 중에서 10일 동안 내가 볼 책들은 과연 몇 권이나 될까.

벌써부터 설렌다.

거실에 앉아 낯설지만 흥미로운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식탁 위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피자에 치킨, 그리고 보쌈에 비빔국수까지.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들이 눈앞에 펼쳐지니, 서로의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투적인 식사시간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마늘보쌈도 먹었고, 감자피자와 구운 치킨이 맛있었다.

점심을 거른 탓에 급하게 먹다 보니 금방 배가 불렀다.

그리고 어색함을 깨는 술과 함께하는 대화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평소 알코올을 즐기지 않는 나는 어색하게 앉아있다가 곧 방으로 들어갔다.

강요가 없는 배려가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사람들보다 일찍 씻고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몸을 뉘어도 쉬이 잠들지 못한다.

눈을 가만히 감고 있어도 애타게 기다리던 잠은 오지 않는다.

늘 그래왔으니까.

사람들의 대화소리를 들으며, 또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그렇게 고요하고 깊은 밤을 기다린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하나둘씩 잠자리로 사람들이 들어온다.

혼자 있다가 사람들이 들어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먼저 들어가도 잠들지 않는 사람.

침대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두들 나처럼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래서 잠깐의 밤마실을 나가기로 했다.

밤에 보는 영해버스터미널은 더 작아보인다. 그리고 3.1 운동 만세시위지.

자정이 다되어서 나오니 벌써부터 별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부산을 떠나 영해에서 만난 밤이 반갑다.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었던 영해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영해면은 원래 주재소가 있는 번영한 곳이었다.

3.1 운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 영해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3.1 운동 보복으로 주재소를 영덕으로 옮기면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현재는 인구가 6천 명이 안 되는 작은 지방도시가 되었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영해면.

10일간 급하게 친해져 보겠습니다.

낯선 이들과의 밤마실이 나에게 참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곧 잠들 수 있었다.


잠이 중요하다.

낯선 곳에서의 나는 더욱 잠과 도통 친해지질 않는다.

밤잠을 설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짧은 밤마실로 금방 잠이든 내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여유 부리다가 부산노포동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놓칠뻔한 아찔한 기억.

포항터미널에서 화장실에 휴지가 없었던 황당한 기억 + 화장실 앞의 매점에서 파는 500원 휴지의 기억.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피어나는 나의 용기를 마주한 기억.

그리고 풍요로웠던 웰컴푸드까지.

아주 알찬 하루를 보냈다.

역사이야기와 시작되는 바다와 함께하는 트레킹.

뚜벅이마을에서의 첫째 날이 그렇게 설레는 밤과 깊은 잠으로 마무리 되었다.

좋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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