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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벌거숭숭이 Mar 07. 2024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남파랑길 2코스 결코 만만하지 않다

날씨가 변덕스럽다.

마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이 아쉬운 것처럼.

봄옷을 꺼내 입기는 마냥 춥고, 겨울옷을 계속 입기엔 조금 갑갑한 면이 있다.

어느새 나를 돌아보고, 나를 염려하고, 나를 보살피게 하는 날씨가 되어 있었다.

오늘은 완전 무장하고 길을 나섰다.

남파랑길 2코스 도전의 첫 번째 날이다.

부산역에서 시작해 영도를 돌아 태종대를 찍고 다시 영도대교에서 마침표를 찍는.

난이도가 중간이라고 평가되는 길을 걷기로 했다.

도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부산역 앞에서 김밥을 한 줄 샀다.

먹을지 안 먹을지는 모르지만, 상비음식으로 챙겨뒀다.

남파랑길 2코스 시작점을 몰라서 부산역에 위치한 갈맷길 투어 라운지에 들어갔다.

직원분에게 문의를 하니 여기는 갈맷길 안내하는 곳이라 모른다고 했다.

남파랑길 2코스는 갈맷길 3-3코스와 결이 비슷하다.

직원분께서 참 열의 없게 일하고 계셨다.

결국 부지런히 움직여 나 스스로 남파랑길 2코스 시작점을 찾아내었다.

다음에 그분을 본다면 알려주고 싶다.

부산역 정면에서 왼쪽에 위치한 토요코인 바로 앞에 있는 두리발 승차장에 안내판이 있습니다.

남파랑길 2코스 시작

상대방에게 친절을 바랄 필요는 없다.

나는 나에게 친절하면 된다.

상대방에 대한 기대는 나에게 실망을 줄 뿐이다.

시작이 아쉬웠지만 괜찮다. 나에게 별거 아닌 일이니까.

부산역에서 남포동 롯데백화점까지 걷는 일은 정말 별것 아니었다.

국제여객항이 있는 이 길은 관공서들이 다 모여있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관공서 주변에는 맛집들이 참 많다.

다음에는 여기 와서 맛집투어를 해야겠다.

사람들이 많은 집을 열심히 보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겼다.

볼거리가 많으면 걷는 것이 수월하다. 금세 영도다리 앞까지 당도했다.

영도다리 앞에 있는 안내판과 남파랑길

다리를 건너고 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나는 완벽한 길치이기 때문에 잠깐 서 있었다.

길을 모를 때는 관찰을 한다.

그러다 내 바로 앞에 등산복을 입으신 여성 두 분이 다리 밑으로 걸어가셨다.

저 길인가 보다. 그렇게 나는 바른 길로 입성하게 되었다.

깡깡이 예술마을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 바로 앞에 아파트가 있는 신기한 길이었다.

걷는 도중에도 계속 깡깡 하는 소리가 들렸다. 쇠를 두드리는 소리.

이곳이 바로 깡깡이 예술마을이었다.

배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수리하는 곳.

철을 절단하면서 나오는 불꽃이 여기저기 산발하고, 망치질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부지런한 소리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그리고 발을 쉬지 않고 걸었더니 금세 흰여울마을에 당도할 수 있었다. 볼거리가 많으니 걷기가 진짜 쉽다.

흰여울마을은 푸르고 푸르르다

해안산책길로 걸어가려고 했으나 공사 중이라 처음부터 흰여울길로 가게 되었다.

바다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맛도 좋았다.

특히나 알록달록 파스텔 톤으로 예쁘게 칠해진 다양한 카페와 소품샵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부산을 여행 오는 사람이라면 여유롭게 바다를 즐기기에 좋은 장소인 것 같다.

나에게는 차 한 잔 즐길 여유보다는 연료를 채우는 게 급했다.

예비용으로 사놓은 김밥을 꺼내놓을 때였다.

내 비장의 김밥. 달인김밥


그냥 김밥도 명품김밥으로 만드는 멋진 장소

한 줄 2200원의 김밥이 이렇게 맛이 좋을 수 있을까.

흔들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한 입, 한 입 정말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김밥 먹는 나를 구경하는 관광객들을 구경하는 나도 좋았다.

이 바다와 편한 의자, 맛있는 김밥에 취해 한 줄을 10분가량 즐기고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앞에 화장실이 있어서 양치까지 깨끗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행운에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계속 앞으로 걷다 보면 사진 찍기 좋은 곳이 등장한다.

흰여울마을 사진 찍는 곳

인물 사진을 기깔나게 찍어야 하는 장소지만 나는 풍경만을 담는다.

다음에 오면 함께 하는 사람과 좋은 사진을 찍으면 되니까.

바다를 보면서 걷는 길은 지칠 새가 없다.

영도에 입성하면 가장 큰 목표는 태종대에 가는 것이다.

절영해안산책로를 쭉 걷다 보면 중리해변에까지 갈 수 있다.

절영해안산책로와 중리해변

영도는 원래 절영도였다고 한다. 말의 그림자가 끊기는 곳이라고 해서 절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말이 워낙에 빨리 달려서 그림자가 못 따라갈 정도였다는 극찬을 한 것이다.

말이 참 재미있다. 영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니. 역시 알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금 이 말에도 그림자가 없군. 재밌는 곳이구나 영도는.

지도 없이도 잘 찾아가는 내가 기특해지는 순간.

영도해녀문화전시관

해녀문화전시관 앞에는 귀여운 강아지가 지키고 있다.

관광객을 보면 웃지만 해녀를 보고는 짖었다. 신기한 강아지였다.

전시관은 2층에 위치해 있었다.

해녀들의 역사와 해녀들이 사용하는 장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바로 앞에서 해녀들이 직접 물질을 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해녀가 물질하다가 바다 위로 오를 때 숨비소리를 낸다고 한다.

해녀들이 내는 숨비소리

휘파람소리. 마치 내가 살아있다고 가족들에게 알리는 소리 같이 들렸다.

생명력이 느껴지는 숨소리이자, 휘파람 소리였다.

바다에서의 일은 목숨을 거는 일과 같다.

다양한 삶이 있고, 각기 다른 생업이 존재한다.

그 전통이 지켜져서 더없이 소중한 것들이 있다.

내가 오늘 본 것이 그런 것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걷다가, 해안가로 앞으로 계속 전진을 했다.

영도해녀문화전시관 앞바다

바위와 자갈, 모래가 있는 길을 걷다가 이 길이 맞나? 의심이 드는 길이지만 계속 갔다.

앞으로 앞으로 계속 가니 산길로 길이 조그맣게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이 길이 맞나?

일단 전진한다.

그러다 절벽을 만나버렸다.

그래서 다시 돌아 나오려는데 익숙한 표지판을 발견했다.

만나면 안 되는 표지판인데 왜 나는 익숙한 걸까

마음이 불안해졌다.

아 군사작전지역이라서 길이 험했구나.

사실 두 손과 두 발로 기어올라간 것은 나만 아는 사실.

내려갈 땐 어떻게 해야 하나 가만히 서있다가 옆을 보니 줄이 보였다.

그 줄을 잡고 미끄러지듯 내려가니 내가 올라왔던 길이 보였다.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나가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역시 이 길이 맞나 할 때는 안 가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지금까지 걸어온 것에 지친 것이 아니라, 길을 잃고 헤맸던 잠깐의 시간 때문에 몸이 급 피로해졌다.

그래서 일정을 변경해 버렸다.

태종대까지 걷기로 마음을 굳혔다.

굳이 내 몸을 고생스럽게 하지 말자.

절벽과 경고판을 보고 놀랜 마음을 달래어주자.

태종대까지 2km

역시 바른길로 가야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하다.

다음에 온다면 이 길은 잃어버리지 않겠지.

무사하게 제 길로 돌아온 것에 만족을 느낀다.

해양대를 지나서 태종대 가는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의료지원단 참전기념비와 태종대

태종대하면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친구들과 고3 되기 전에 같이 여행을 가보자고 해서 찾아온 곳이다.

그 당시는 타 지역에 살고 있어서 태종대 오는 방법을 찾아서 와야 했는데, 그때의 가이드가 나였다.

조사가 미흡하여 태종대 방향으로 가지만 태종대는 가지 않는 버스를 타버려서 친구들과 2시간을 헤맸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같이 갔던 친구 중에 구두를 신고 온 친구가 있어서 더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편의점도 많이 없을 때여서 신발도 못 사고 아픈 다리를 끌고 나를 욕하며 걷는 친구가 그렇게 애잔하면서, 미안하면서, 또 많이 웃겼다.

편의점을 발견하니 바로 앞이 태종대였던, 태종대까지는 왔지만 태종대의 경치를 돌아보지 못했던 웃픈 기억.

태종대를 보니 네가 생각난다 하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오늘 나도 태종대만 보고 버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오늘의 내 체력은 여기까지다.

완벽하지 않은 계획에 맞춰 단조로운 마무리를 해버렸다.

뭐 어떤가.

그래도 좋으면 괜찮은 거지.

2만 4 천보 달성

사람이 하루에 2만 보 걷기가 진짜 힘든 것 같다.

만보는 쉽게 하는데 2만 보가 힘들다.

그 힘든 것을 해냈으니까 오늘도 나는 꽤나 괜찮은 하루를 보낸 것 아닐까.

그리고 또 추억할 하루를 만들어냈으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하루.

김밥 한 줄이 성찬이 되고, 잘못 든 길이 추억이 되는

나름 낭만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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