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주는 존재감이 거대하다
나에게는 주말을 기다리게 만드는 아가야가 있다.
아가야는 말이 없고 만져짐을 좋아하는, 밥투정을 하며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랑스러움을 겸비하고 있다.
용의 해에 태어나 용이라는 이름이 지어졌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다.
언제나 아가야는 나에게 아가야였다.
추운 겨울에 찾아온 그 아이는 새하얀 모습으로 찾아왔다. 진도견 믹스인 그 존재는 호기심이 많고 사람을 잘 따르면서 따로 훈련을 시키지 않았는데도 집안에서는 소변, 대변을 보지 않았다.
그 영특함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그 아이의 특기였다.
존재함으로써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는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을까.
주말마다 찾아가는 시골집에 있는 개가 처음에는 그저 좋지 않았다.
벌레와 쥐가 많은 시골에는 고양이가 이미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남몰래 찾아와 집안을 어지럽히는 고양이가 반갑지 않았던 집주인은 개를 데리고 온다.
그저 개는 집을 지키기 위한 존재라고 생각한 사람은 강해 보이는 것이 좋아 처음에는 투견을 데리고 왔다.
투견을 처음 보았을 때는 생긴 모습에서 오는 위압감에 쉬이 다가가기 어려웠다.
다 자란 성견이라 힘이 세고 주말마다 찾아오는 내가 낯선지 무섭게 짖어대곤 했다.
처음에는 시골집에 개가 있는 것이 불편했다.
그래도 집주인은 나름 만족하는 듯이 개를 돌보면서 살았다.
사실은 바로 이웃에 사는 집주인의 형이 개를 훨씬 좋아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 키우지 못했는데, 동생의 집에 개를 두면서 무언가 대리만족하는 기분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모르는 모종의 이유로 개가 몇 번의 이동을 거치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동안 많은 강아지들이 시골집을 거쳐갔다.
잘생겼지만 짖지 않아 미움을 받았던 강아지, 무섭게 생겼지만 애살있게 애교를 부리던 투견.
한여름에 임신하고 강아지 5마리를 낳은 투견을 위해 닭을 삶아주기도 했고, 덥다고 밤새 우는 강아지들을 위해 밤새 선풍기를 틀어주기도 했다. 눈도 채 뜨지 못하는 강아지들을 내가 만지면 어미가 싫어할까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아기였던 강아지들을 볼 때마다 씻기고 안아주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아장아장 걸으며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강아지들을 더 좋은 곳으로 입양 보내고 두 마리, 한 마리 남을 때마다 본연의 투견모습으로 변하는 모습조차도 사랑스러웠다.
몸은 커도 마음은 자라지 않는 아이처럼, 험상궂은 얼굴이지만 나만 보면 방긋 웃던 첫 번째 아가야는 참 순종적인 아이였다. 내가 그 아이에게 마음을 열려던 찰나, 시골집에 들르던 큰고모의 한마디에 아가야가 사라졌다. 무섭게 생겨서 이 집에 오기 싫다고 한 것이다. 나쁜 사람들, 무책임한 사람들.
나의 아가야가 사라졌지만, 온전히 책임질 수 없었던 나 또한 아무 말할 수 없는 사실에 분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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