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들고 다니는 남자

한나의 사진 일기

by 이한나

6월의 여행을 좋아했기에 여느 때처럼 6월에 떠나기로 계획했다.

일이 힘들 때면 6월의 제주도를 생각하며 버티고 버텼는데... 수험생 딸내미가 갑자기 미술 전공을 하겠다는 바람에 우리 부부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채 그대로 눌러앉았다.

결국 이번 여름 휴가지는 환상의 나라 '에버랜드'와 집 앞에 있는 호수공원이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라도 하면 마치 약속했던 것처럼 비가 내린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란 말인가... 미세먼지도 하나 없고 쨍쨍한 이 날씨!!

살짝 뜨거운 6월의 태양이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오늘 비가 내리기로 했던 거 알지? 예정대로라면 비가 와야 돼. 너네가 여행만 가면 비가 왔잖아. 하지만 이번엔 아니야. 비 안 내릴 거니까 이거라도 즐겨. 수험생 엄마 아빠로 사는 거 힘들잖아~ 휴가도 못 떠나서 아쉬워하는데 비 안 내릴게. 약속해..."

태양의 속삭임을 알턱이 없는 내 친구 지영이는 놀고 있는 나를 놀리고 싶었는지 카톡을 보냈다.

친구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태양은 끝까지 약속을 지켰으니까...

'태양의 약속은 둘째 날에도 이어지는 걸까?'


태양의 약속을 알리 없는 남편 역시 언제 비가 와도 어색하지 않을 날씨라며 우산을 챙기고 산책길에 올랐다.

"비가 와락 쏟아졌으면 좋겠어. 내가 우산 챙겼으니까!!! 비가 마구 내릴 때 사람들은 당황하겠지? 그때 오빠가 우산 활짝 펴줄게. 우린 여유 있게 걷는 거야~ 사람들이 우릴 부러워하겠지??"

대체 뭐라는 건지... 나는 남편의 이상한 말 대잔치에 한마디 덧붙였다.

"마음을 곱게 써... 오빠 우산 챙겨 왔다고 그러냐???"


비록 마음씨가 곱지 못한 사람과 있었지만... 나와의 약속 때문인지 하늘에서는 하나의 빗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계속 우산을 들고 걸어야 하는 남편

그런데... 남편의 고생함에 보답하기라도 하는 건지 남편이 화장실에 간 사이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산이 있어서 다행이다... 우산 들고 걷느라 번거로웠을 텐데... 이렇게 비가 오다니. 남편 오면 좋아하겠네~~ 인증사진이라도 찍어야지!!!'


남편의 급똥 처리 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춰버렸다.

"여보 여보!!! 진짜 여보 똥 쌀 때만 비가 왔어 ㅋㅋㅋㅋ 우산 봐봐... 비가 진짜 주룩주룩 왔다니까~~~ 여행 못 가는 우리 부부 여기서라도 즐기라고 비가 안 내리나 봐."


산책을 사랑하는 우리는 저녁을 먹고 또 집 앞 천변으로 걷기 시작했다.

날씨는 우리 편이라는 걸 알고 이번만큼은 가볍게 나오자는 마음으로 우산을 들지 않았는데... 그랬는데...


거센 빗방울... 이건 뭥미??

결국 우리는 작은 마트로 들어가 우산을 구입했다. 우산을 고르는 남편은 신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산 사면 계속 쓰는 건데 뭐~ 비 맞으면 감기 걸리고, 운동화 세탁비 들고, 우산 사는 게 더 싼 거지! 이 우산 가성비 좋아 보이는데~ 사놓으면 딱이겠다!~"

남편은 거친 야성미를 뿜으며 우산의 비닐을 제거하고 활짝 우산을 펴려는데~~~~

헐!!! 또 비가 안 온다!!!

남편은 비닐을 뜯어버려 환불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손을 탓하지 않았다.

"야~ 비가 올 거야! 우리 집까지 갈 때 분명 비가 올 거니까... 괜찮아!!! 분명 우산을 쓰게 될 거라니까~~"


40분을 넘게 더 걸어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달은 민망해하는 남편의 얼굴을 더 선명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남편은 다시 말을 바꿨다.

"나 사실 이거 호신용으로 샀어~~~ 나쁜 놈들 오면 너 지켜주려고~~ 내 맘 알지??"

나는 한참을 웃다가 "다시 아까처럼 포즈 취해 봐~~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어~~"라는 말을 하며 사진 속에 남편을 담아냈다.

우리의 이틀 간의 휴가는 그렇게 끝이 났고, 태양은 달이 주인인 밤의 시간까지 나와의 약속을 지켜주었다.

"태양아 고마워! 너 덕분에 많이 웃었어."


다음 날 출근한 남편은 내게 카톡을 보냈다.

평범한 여느 때의 시간을 보낸 듯하면서도 돌이켜보니 참 특별한 것처럼 느껴졌다.

+수험생 엄마 아빠한테 주었던 태양의 선물 바로 타이밍이 끝내주는 날씨와

+어두운 밤 우산을 든 호위무사 남편에

+다음 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우산까지 얻은 하루...

생각해 보니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순간들이었다.


'그래도 나름 휴가인데~~~ 즐겁게 보내야지~~!'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다른 주말의 시간과는 달랐던 하루였음은 확실했다.

'치'하고 삐졌다가도 휴가이기에 빨리 화를 풀고,

즐겁게 휴가를 보내야 하기에 작은 것에도 더 많이 웃고,

기억에 남는 휴가를 보내야 하기에 벤치에 앉아서 먹는 커피 한 잔도 낭만 가득했던 시간들...


가끔은 지친 일상에 '휴가'라는 마음을 입혀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하루를 통으로 다 가질 순 없지만 짬이 나는 순간순간 그냥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특별한 휴가'를 정해본다면??

그냥 보낼 수 없기에 더 많이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보낼 수 없기에 차 한잔 마시며 바라보는 바깥 풍경이 더 예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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