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도 괜찮아!

by 이한나

마트 진열대에 있는 쫄면이 나를 부른다.

아줌마! 여름엔 쫄면이지! 주말에 밥하기 싫지 않아요?
한 끼 뚝딱인데! 아줌마~ 나를 픽하라고~!


쫄면이라... 맛있을까? 쫄깃쫄깃 면발? 새콤달콤 양념?

역시나 배가 고플 때 장을 보면 망한다.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 앞에서 바다같이 넓은 포용력이 생기고 '그래 먹어보는 거야! 맛있을 거야~! 내가 먹어줄게.'라며 굳세게 다짐한다.


영양제를 사러 간다는 나의 임무는 기억하지도 못한 채 "내일 점심 메뉴 쫄면!!"이라고 외친다.

평소 면을 즐기지 않는 내가 쫄면을 산다고 하니 남편은 "먹지도 않는 면은 웬일로 먹재?"라며 힐끔 쳐다본다.


콩나물, 양배추, 깻잎, 당근, 오이로 잔뜩 멋을 부린 뒤, 삶은 달걀 하나를 반으로 뚝 잘라 올린 쫄면.

배고픈 우리는 인증샷 한 장 찍을 겨를도 없이 후다닥 뱃속으로 밀어 넣으며, "맛있네"를 연발했다.

그간 쫄면이 맛없던 이유는 내가 양념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식품회사에서 만든 양념장은 정말 탁월했다.


그렇게 쫄면에 어울릴 만한 서브 메뉴로 만두를 떠올릴 때쯤 아이는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엄마! 쫄면이 말이야. 실수로 만들어진 음식이래~ 잘못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좋아해서 만들게 되었대."

나도 드라마 한 장면에서 본 것만 같았다. "맞아! 엄마도 어디서 본 거 같아. 그런 음식이 꽤 있다고 하더라~!"

아이는 온라인 수업으로 집에 있는 동안 엄마 아빠한테 그렇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꿋꿋하게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덕에 오만 잡동사니 정보를 갖고 있었다.

종종 우리에게 '잡사'로 통하는 아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엄마~ 아빠 내가 인스타에서 봤거든. 그런 음식이 장난 아니게 많아. 내가 웹툰만 보는 게 아니라니까!!! 우리가 먹는 감자칩도 너무 두껍다고 짜증 내는 손님한테 골탕 먹이려고 얇게 한 건데 대박난 거래. 또 뭐더라~ 시리얼도 그렇대. 브라우니도 그렇고, 초코칩 쿠키도 그렇대. 직원이 모르고 반죽이랑 초콜릿을 안 섞어서 구웠대. 구우면 다 녹을 줄 알고. 그러다가 만들어진 거래. 암튼 그렇게 실수로 만들었는데 엄청 대박 난 거지..."


난 리액션을 잘하는 엄마이고 싶었다.

"정말? 너무 신기하다~ 꼭 실수가 나쁜 건 아니네~! 우리 딸은 아는 것도 많구먼~!"


그러나 리액션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딸아이는 갑자기 "나랑 똑같네... 실수로 만들어졌어."

(참고로 아이의 밑도 끝도 없이 물어대는 속도위반 질문에 대답해준 나는 수시로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나는 순간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의 다급한 구조 요청을 느낀 남편은 평소 볼 수 없던 순발력을 발휘했다.

다민아. 실수로 생기면 어떠냐!
너도 시리얼처럼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영양가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거야.
처음 시작은 중요한 게 아니야. 너도 쫄면이 될 수 있어!


오 대박이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지만 아이는 만족감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우리 셋은 뭐가 그리 좋았는지 마룻바닥에 뒹굴며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 광고처럼 "야! 너도 쫄면 될 수 있어! 너도 나도! "라는 부푼 기대감이 우릴 즐겁게 했나 보다.


그렇게 아이와 깔깔 웃었던 기억을 남겨두고 싶던 나는 브런치에 딱 여기까지 글을 적어놨다. (논문을 쓰며 정신없던 나는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기록에 머문 글을 종종 쓰곤 했기에...)

모든 것이 정리되어 여유를 부리고 있는 나는 내가 적어놓은 기록들을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라는 생각을 하며 글을 읽던 중 이 쫄면의 글은 내 마음에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뭐랄까... 거슬렸다.

그 당시 탁월한 답변이라고 엄지손을 치켜세우던 내가 싫었다.

너의 시작은 비록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아니 반드시 창대해야 된다고 강요하는 모습처럼 느껴졌다.


"꼭 쫄면이 돼야 돼?"

"모두에게 사랑받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야 돼?"

"영양가 있는 사람이 돼야 돼?"라는 질문이 이어졌고, 결국 "그게 내 맘대로 돼?"라는 최종 물음표로 마무리되었다


매사 긍정 마인드를 부르짖던 내가 비행청소년이 된 기분이었다.

나의 이런 마음의 변화는 현재의 모습이 투영되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늘 눈을 반짝이며 "인간에겐 무한한 능력이 있지. 뭐든 할 수 있어!"를 외치던 패기 넘친 이한나였다.

식을 줄 몰랐던 나의 긍정은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나만큼은 잘될 거라는 확신을 안겨주었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한 것일까?

눈에 보이지도 않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 삶을 뒤덮었고 나의 계획을 다 무너뜨렸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의 시간 속에서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은

'내 맘대로 안된다.'는 것과

'여태껏 계획대로 되었던 것이 기적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늘 생각만 바꾸면 된다고 믿어왔던 나.

나의 오랜 신념은 무너졌다.

"어머~ 그럼 부정적인 사람이 된 건가요?"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아니요. 여전히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려 하지만,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요. 제가요. 예전에는 맘만 먹으면 다 되는 건 줄 알았어요. 제가 그간 계획하면 다 되니까 그랬나 봐요. 근데요. 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거. 아무것도 아닌데 그간 까불었다는 거 알았어요."


나는 그동안 유한한 능력을 무한한 능력이라 믿으며 얼마나 교만한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

나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했던 나의 마음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까불고 있네. 그저 타이밍이 좋았을 뿐이야.

행운이란 게 돌아다니다가 내게 잠시 머물렀을 뿐이야.


물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무언가를 하겠다고 발버둥 치며 움직이던 나도 존재했지만, 발버둥 치는 나 위에 명확하게 하늘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순간순간 지나가던 행운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어깨를 들썩이며 살아온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겸손함이 무엇인지 이제 글이 아닌 내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 나를 알게 되니... 나는 문득 아이에게도 말 해주고 싶었다.


다민아. 꼭 쫄면 안돼도 돼.
그리고 네가 쫄면 돼야지 한다고 쫄면 되는 거 아니야.
그냥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행운이 올 때도 있고 그런 거 같아.
그냥 행복하게 살면서, 네가 하고 싶은 것들 하면서... 열심히 살면 되는 거야.
쫄면 되는 거에 연연하지 마.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란 이야기는 아니야.
그냥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되 쫄면 되는 거에 부담 갖지 마.
괜찮아... 국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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