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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Sep 11. 2020

소수의 사기꾼이 사는 따뜻한 세상

아이를 기르며 간신히 대학원을 졸업한 나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내 이름으로 남겨진 학자금 대출만큼은 스스로 갚고 싶었기에 더욱 간절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애절한 마음과 다르게 나를 글로 담아낸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는 한 번도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기에 나는 취업준비생으로 남아있었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멍청한 곳 같으니라고'라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던 나는 "뽑아줘도 안가"라고 큰소리치며 직접 사업체를 차려 사장이 되겠노라 결심했다.

그렇게 준비 없이 1인 기업의 사장이 되었다. (그때의 나는 체육학을 전공하였기에 유치원과 계약해 체육교사를 양성하여 파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아무런 경험과 대책도 없이 시작된 사업이었기에 실수와 함께 천천히 하나하나 배워가던 나였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어린이집에 문을 두드리며 선물과 전단지를 전달했던 시간이 점차 쌓여갔고 시범수업을 통해 그간의 노력을 증명해 볼 기회도 생기게 되었다. 이후 많은 어린이집과 계약을 하면서 함께 일할 직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보다 대부분 나이가 어렸던 직원들은 나를 '원장님', '대표님'이란 호칭으로 부르다가도 사석에서 있을 때면 '누님', '누나'라고 부르며 함께 어울리길 좋아했다.

다들 귀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중에 유독 '열정남'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자마자 사무실 비밀번호키를 달아놓더니, 교구들을 정리해야 한다며 사무실 길이를 재서 앵글을 짜 놓고 교구들을 정리하던 그였다. 수업이 마치면 오는 길에 전단지도 돌리고 오는 그런 직원이었다.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열정남과 만나 수다를 떨고 좋은 관계로 보내고 있다.

각자의 사업을 운영하고 있지만 도움의 요청을 보낼 때마다 밝은 표정으로 달려와 나를 도와주는 열정남은 내게 좋은 친구이다.


다만 이 열정남에게 한 가지 흠이 있었으니....

그는 지독히도 '세상에 대한 불만, 사람에 대한 적대심'이 있었다.

나는 꼴에 누나라고 "철수야(가명)~ 너는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세상에 좋은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자꾸 그렇게 생각하면 될 일도 안돼."라며 인생 2년 더 살았다고 오만 아는 척을 다했다.

그렇게 '열정 가득한 부정남' '세상 밝은 초긍정녀'는 만나기만 하면 끝이 없는 토론을 해대곤 했다.




코로나로 열정남도 만난 지 오래되었을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누나 잘 지내?"

"잘 지내지! 너는 사업 잘되고? 얼굴 한 번 봐야 되는데... 얼굴 보기 힘드네~~~ 목소리 들으니까 엄청 밝아 보이네. 카페 운영은 잘되고? 요즘 코로나 때문에 타격이 크겠다. 힘들지?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 조심하고, 다들 힘들다 보니 속여먹는 나쁜 사람들도 엄청 많아. 특히 조심해."

"누나가 웬일이래? 그런 말을 하고?!"

"웬일은 무슨 웬일이야? 세상에 못돼 처먹은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사기 쳐서 등쳐먹는 인간들이 좀 많냐? 득실거리지. 너 진짜 조심해. 알았어??!!! 사람 쉽게 믿지 말고!"

"야~~~~ 나 누나랑 지내면서 이런 소리 또 처음 듣네. 뭐야? 왜 이렇게 변했어? 맑고 깨끗한 세상 운운하던 누나가 왜 이래?"

"뭘 왜 이래? 사기꾼들이 하도 많으니까 그렇지. 밥 먹어야 돼! 암튼 정신 잘 차리고 살자!"


그렇게 전화를 급하게 끊고 열정남이 한 말들을 천천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변했다고?'

난 변했다. 사실 1년 동안 연달아... 소소한 중고 사기부터 시작해 4건 정도의 사건이 있었다.

돈만 다 받고 나면 계약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다거나,

계약조건을 변경한다거나...

돈을 받고 연락이 두절된다거나 등등


그래서였을까? 최근 나는 통화 중 녹음하는 버릇까지 생겼다.(계약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일로 몸과 마음이 힘들어지니 나 역시 세상이 곱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열정남도 20대에 사업을 크게 해 10억을 손에 쥐었으나 7억이 넘는 돈을 사기를 당했다고 했다.

그저 자신이 늙어서 바닷가 옆에 살고 싶어 태안 주변에 사놓은 땅만 덩그러니 남은 열정남은 자신의 돈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법적 공방에 갇혀 있었다.


사업을 하며 받지 못한 돈을 받기 위해 뛰어다녔던 열정남의 모습과

계약 시 받기로 한 돈을 받아내고자 녹취기록을 찾던 초긍정의 내 모습...

어딘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누나 많이 변했다.'라는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래 나 변했어.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더라고! 큰 소리 안 내고 조용조용 말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이것들이 가마니로 보질 않나? 나쁜 새끼들, 사기꾼 새끼들."

어렸을 적 내가 본 엄마의 모습처럼  또한 혼잣말의 귀재가 되어버렸다.


문득... 지난날 열정남에게 부정적이라고 훈수를 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열정남의 7억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 돈이지만...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기꾼'으로 불러댔다.

열정남... 너도 많이 힘들었겠다.

대학교 1학년 다니다 자퇴한 뒤 몸을 갈아 부숴가며 번 돈이었을 텐데...

(아침엔 지하철역 앞 샌드위치 장사부터 시작해... 직업이 3-4개였다고 전해 들었다.)

그런 돈을 사기당하고, 오랜 시간 법적 싸움을 해왔지만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던 열정남.

(난 열정남이 왜 그리 법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지 이제야 알겠다.)


환경이 사람을 바꿔놓았다.

그러나 나는 그 환경을 들어보기도 전에 사람을 탓했다.

'생각을 바꾸라고!'

'밝은 세상을 보라고!'

그렇게 열정남을 타박했다.


하루가 지나도 열정남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던 나는 동네를 한 바퀴 천천히 돌고 있었다.

아파트 입구 계단을 열심히 청소하시는 아저씨가 계셨다.

평소라면 인사를 했겠지만 사람이 싫었던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는 계단을 내려가던 나를 바라보시며 "안녕하세요? 오늘은 개가 없네요. 하하~ 좋은 하루 보내시고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아....... 네.... 감사합니다.........."


열정남에게 미안했던 내 마음은 다시 청소하는 아저씨에게로 옮겨졌다.

'아저씨까지... 미워해서 미안해요. 아저씨는 좋은 사람인데 말이죠...'


세상에 좋은 일, 좋은 사람도 많지만... 큰 상처와 타격을 받은 기준으로 세상을 다시 정의하게 된다.

상처 주고, 나를 속이고, 농락했던 그들을 증오할 쯤에는 다른 사람들마저 부정의 렌즈를 끼고 바라보게 된다.


'그 당시 열정남은 아물지 않은 상처로 세상이 얼마나 미웠을까?'

그런 열정남에게 매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넌 왜 이렇게 배배 꼬였냐?!'라고 말한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나는 계단을 청소하던 아저씨처럼... 그저 따스한 한마디를 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자신을 '인복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열정남에게 나는 위로가 되고, 따스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평생을 살며 만난 소수의 나쁜 사람 몇몇으로 인해... 좋은 사람들까지 잊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나도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을 갖아야겠다.

"세상은 아름답다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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