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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Nov 19. 2020

먼저 말 걸면 죽는 남자

출근해야 할 남편이 내 옆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고이 잠든 남편을 흔들며 말했다.

"여보 여보!!! 왜 자고 있어? 회사 안 가???"

"회사에서 처음으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어. 옆 건물인데 이어져있는 건물이라 전체 나오지 말래. 일단 오늘은 출근 안 해."

다행히 나도 일이 없었기에 우리는 그대로 그렇게 잠들었다.

나는 자면서도 배가 고파 '뭘 해 먹지'라는 고민'닭갈비를 해 먹어야지'라는 결심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나와 다르게 남편은 끝끝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침대에서 탈출했고, 냉장고를 열며 외쳐댔다.

"나 야채호빵 먹는다!"

맛있게 닭갈비를 먹고 싶었던 나는 "여보~ 금방 닭갈비 먹을 거니까 가볍게 사과 먹는 건 어때??"라며 친절과 공손을 겸비해 내 마음을 전달했다.

그런데 남편 자식이 갑자기 짜증 한가득한 목소리로 "왜 야채 호빵을 못 먹게 하는 거야? 왜 먹는 것 까지 간섭하는데!!! 이거 하나 먹는다고 닭갈비를 못 먹어??"라며 내게 결투 신청을 보냈다.


나는 무방비 상태로 봉변을 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남편은 토라진 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소파에 누워있었다(쪼잔한 새끼).

억울함이 목까지 차오른 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오빠, 나는 늦잠 자고 일어났으니... 금방 점심 먹을 거니까. 맛있게 먹고 싶어서 한 말인데... 그게 그렇게 짜증을 내면서 할 말이야? 그게 그렇게 짜증 낼 일은 아니잖아!"라며 결투 신청에 맞섰지만...

이미 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남편은 진심이 1%도 담기지 않은 "그럼 짜증 낸 건 미안해."라는 엉터리 말을 내뱉고는 휙 돌아서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맺혀있던 눈물이 쏟아진 나는 집에서 나와 커피 한잔을 사들고 야외 벤치에 앉아있었다.

추웠다. 어쩌다 찾아온 우리 둘만의 시간이 그깟 야채호빵 하나로 날아가버리다니...

닭갈비도 먹고, 영화도 보고, 재밌게 보내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글러버린 하루였다.


남편은 먼저 말 걸지 않으면 절대로 말하지 않을 인간이다.

고등학교 시절, 같은 기숙사 방을 쓰던 불알친구와도 사소한 문제로 1년을 말하지 않았던 남편이다.

(심지어 바로 침대가 붙어있는데도...;;;;)

오죽하면 연애 기분 내려고 매일매일 새로운 질문에 각자 답을 하는 어플에도 나는 아래 사진처럼 답을 썼다.


이걸 쓰는 날에도 남편이 꽁해 있어서 열 받았음...


반면 나는 남편과 성향이 다르다.

마음이 상한 상태로 있는 것이 힘들고, 불편하고, 가슴이 두근두근거린다.

그래서인지 매번 다툴 때마다 남편에게 찾아가 "미안해."라는 말로 먼저 말을 건넨다(생각해보면 내 잘못도 꼭 있었기에). 그럼에도 도저히 내 잘못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화해하자! 지금 사과하면 받아줄게. 기회는 한 번이야. 빨리 사과해"라는 말로 화해를 시도한다.


그 순간 얼음나라의 왕자는 갑작스러운 변신을 한다.

큰 몸을 웅크려 내 품에 안기며 "오빠가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다 오빠가 잘못한 거 알아. 반성하고 있었어. 오빠 한 번만 용서해줘. 용서해 줄 거야? 그런 의미로 뽀뽀 한 번만 해줘."라는 느끼한 멘트를 남발한다.


그저... 나와 사는 이 남자는 감정이 상한 뒤 잠깐이라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고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그런 사람인가 보다. 어쨌든 오늘도 내가 먼저 말 걸지 않으면... 금쪽같은 휴가는 하늘로 날아갈 듯하다.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그리고는 소파에 누워 쳐다도 보지 않는 남편을 발로 툭치며 말했다.

"오빠는 그렇게 짜증내고 하나도 안 미안했지? 미안했으면 이러고 있지 않았을 거야. 진짜 못됐어!! 오빠 이러다가 황혼 이혼 당해!!"

그제야 물꼬를 트어주니 남편은 재빨리 일어나 무릎을 꿇는 자세를 취하며 쫑알거린다.

"여보! 여보 나가 있는 동안 내가 환기 다하고 청소 다 했어. 반성하면서 했어. 내가 왜 그랬을까 반성 엄청나게 했어. 이제 야채호빵은 평생 안 먹을 거야. 여보 엄청 기다렸어... 그리고 말이야... 오빠가 짜증 내도 네가 먼저 사과하기로 했잖아."


"대체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해서 사과를 하냐고!!!!!"


"저번에는 알았다며? 먼저 사과해준다며? 그냥 그런 거야. 네가 먼저 말 걸어줘. 그냥 네가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해줘.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하고 있었어. 그냥 그렇게 해줘~"


남편은 이후에도 내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오빠가 짜증내서 미안해. 나는 오늘 닭갈비만 먹을 거야. 오빠가 미안해. 다음부터는 빨리 말 걸어줘. 알았지?"라는 말을 반복했다.

 


문득 집안일 분담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남편은 재활용과 음식물 쓰레기를 버린다.

-남편은 빨래를 갠다.

-남편은 화장실 청소를 한다.

보통 이 세 가지는 남편이 출장 가지 않는 한 남편의 고정된 가사이다.


집안일을 할 때도 명확하게 분담이 되어있다.

-누군가 설거지를 하면 누군가 식탁을 치우고.

-누군가 청소기를 돌리면, 누군가 청소기가 올 장소를 정리하고.

-누군가 요리를 하면 누군가 정리를 하고.

알게 모르게 만들어진 암묵적인 약속.


이러한 약속은 우리의 삶을 참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어쩌면 가사뿐만 아니라... 마음이 상하는 순간에도 우리에게는 약속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사소한 말다툼에도 둘 다 밤새 뒤척이느라 다음 날이면 퀭한 모습의 좀비가 되는 우리들.

신경전도 젊을 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남편은 내게 다음과 같이 제안을 했다.

"그냥 사과만 먼저 해줘.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게."


잘못의 비중을 측정하고, 경중에 따라 사과할 사람을 선정해 기다리는 일은 참으로 힘들다.

-먼저 손을 내밀기만 한다면...

-먼저 말을 건네기만 한다면...

잠도 푹 잘 수 있고, 맛있는 것도 함께 먹을 수 있고, 아이의 마음도 편안해지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만 있기에...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담하면 되는 것이다.

-말을 걸어주는 것은 나의 몫.

-뒤따라 다니며 부드러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은 남편의 몫.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남편이 출장 가면 내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듯...

어떤 때는 남편이 내게 먼저 다가와 "미안해"라는 말을 속삭이고,

어떤 때는 "여보~~~~ 화 풀어~~~ 미안 미안~~~ 색시가 잘못했어."라는 말을 하며 남편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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