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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Jan 05. 2021

여행만 가면 아픈 남자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나와 딸을 지켜주겠다던 남편의 약속이 좋았다.

남편이 곁에 있을 때면 늘 든든하고 안전했다.


평소 낯선 길에만 가면 진땀이 나고 '좌꺽(왼쪽으로 꺾고), 우꺽(오른쪽으로 꺾고)'을 적어대는 나이기에 새로운 곳에서는 남편의 손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여행이라도 가면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여보~ 여긴 어디야? 이렇게 멀리까지 걸어도 우리 차로 잘 찾아갈 수 있지?"라는 말을 하며 돌아가는 것에 대한 걱정을 잔뜩 하곤 했다.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정 걱정해야 할 것은 내 옆에서 날 평생 지켜준다던 '저질 체력의 아저씨'였는데 말이다.


"머리 아파?"

"어디 아픈 거 아냐?"

"나중에 아프다 하지 말고 조금 아프면 바로 말해!"

 

이 남자... 대체 왜!!!

여행만 가면 아픈 것일까?!!!!!


두통은 아주 평범한 것이고, 발열도 두 번 여행에 한 번, 조심히 먹어도 간간히 찾아오는 장염들로 인해 여행에서 많은 시간을 공칠 때가 많았다.

속초에서도, 제주도에서도, 담양에서도, 경주에서도, 여수에서도, 남원에서도... 남편은 아팠다.


밥도 못 먹고 전사해 있는 남편이 안쓰럽다가도 '이 인간이 또 시작이구나' 싶은 마음에 "그러니까 바로 약 먹으라고 했잖아!"라며 앙칼진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도 한다.

날 지켜준다더니 개뿔! 

나는 하나도 귀엽지 않은 덩치 큰 아들을 지키기 위해 매번 따스하게 옷을 입었는지 확인하고, 목도리를 둘러주고, 잘 때면 차 버린 이불을 덮어준다.

그랬다. 나는 그를 지켜내느라 슈퍼우먼이 되어 온 집안을 누비며 돌아다녔다.


그렇게 평소처럼 내 가족을 수호하겠다고 마루를 활보하던 중 퇴근한 남편이 세상 피곤한 표정으로 집에 들어오고 있었다. 친절한 슈퍼우먼은 남편을 향해 "피곤해? 많이 힘들어 보이네. 뭐 줄까?"라고 소리 내었으나 실상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렇게 피곤한 거야? 아우... 저 졸린 눈 하고는... 누가 보면 회사 일 혼자 다한 줄...'


내 마음을 알리 없는 남편은 외출복을 벗어버리고는 나를 꼭 껴안았다.

"나 너무 힘들었어. 오늘 시험하느라 하루 내내 서있었어. 나 몇 보 걸었는지 알아? 14000보... 진짜 너무 힘들어."

"여보 말 안 해도 알 거 같아. 여보 겨땀 냄새로 알 수 있으니까... 제발 팔 좀 내려."

남편은 그럴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두 팔을 위로 들고 "오늘 고생의 흔적이야. 빨리 와서 맡아봐!!!"라며 나의 얼굴에 자신의 겨드랑이를 끊임없이 가져다 댔다.


화장실로 내쫓고 나니 마음 한편이 왜 이리 묵직해졌는지 모르겠다.

-땀도 잘 안나는 남편이 한 겨울에 얼마나 움직여댔으면 땀이 났을까?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일어나 회사를 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울까?

-밥만 먹으면 졸릴 남편이 회사에서는 어떻게 잠을 견뎌낼까?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활동하며 몸은 얼마나 고될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이 사람들 틈에서 오늘 하루 얼마나 부대꼈을까?

늘 쌩쌩한 남자랑 살고 싶다고 말하던 모습이 떠올라 한없이 미안해졌다.


마음이 시큰해지고 먹먹해질 때쯤 남편은 화장실에 나와 벗은 몸으로 내 앞에서 근육을 과시한다.

"어때? 오빠 멋있어?"

"응 멋있어. 많이 멋있어."

나는 마음을 더해 한마디 더 전해 본다.

"오빠... 고마워. 우리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해줘서... 너무 고마워."

남편은 뭐가 신이 난 건지 "마트 가자! 샤인 머스캣 사 줄게. 오빠가 그 정도는 사줄 수 있어!"라며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그리고는 마트에서 당당하게 말한다.

"오빠가 많이 벌진 못해도 너 먹고 싶은 과일 사줄 정도는 돼! 먹어!!!"


고마웠다.

슈퍼우먼이라고 믿는 내 뒤에는 '진짜 슈퍼맨'이 있었다.

그 슈퍼맨은 늘 "괜찮아. 나는 괜찮아."라는 말을 한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대체 왜 괜찮다는 걸까...

사실 슈퍼맨은 힘을 얻는 방법이 따로 있다고 말했다.

-식탁에서 푸드파이터가 되어 모든 그릇을 비워내는 아내와 딸을 보면...

-세상모르고 침대에 곤히 잠들어있는 아내와 딸을 보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가 매일 아침 힘겹게 슈퍼맨 옷을 입는다는 것과... 슈퍼맨 옷을 벗으면 너무나 연약한 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인지... 나는 종종 슈퍼우먼의 옷을 입고 그를 지켜내고 싶다.

"내가 슈퍼우먼이 되어 자기 지켜줄게. 작은 무릎이라도 내어줄게. 나한테 기대. 내가 꼭 안아줄게.

고마워~ 나의 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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