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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나 Apr 06. 2021

두통 유발자

"기차를 타는 당신! 어느 위치의 좌석을 선호하시나요?"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지방 출장이 잦은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할 것이다.

"아~저는요! 문 앞은 싫어요.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바람이 슝슝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중간 정도가 좋고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꼭 창쪽이어야 해요. 이유는 한 가지예요. 블라인드를 제 맘대로 하고 싶거든요."

그랬다. 열차 탈 때만큼은 블라인드 권한에 집착하는 나였다.

눈부신 햇빛도 싫지만,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배경은 내 속을 울렁이게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기에...


부산에서 열차에 올라탄 나는 언제나처럼 창쪽에 앉아 블라인드를 잽싸게 내렸다.

나의 감은 두 눈은 빠르게 깊은 낮잠으로 인도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옆에 앉았고 내 쪽으로 손을 뻗어 (나의) 블라인드를 휘리릭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마음속으로 외쳐댔다.

'통로 쪽에 앉아 놓고선 내 자리까지 손을 뻗어 블라인드를 올리다니...

나는 창쪽에 앉은 대신 소변이 마려워도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 참는단 말이야!!

블라인드는 내 권한이라고!'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부르짖었던 나는 이대로 멈출 수가 없어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눈치채지 못하게 야금야금, 슬금슬금 블라인드를 내려댔다.

티끌모아 태산이라 했던가? 어느새 블라인드는 창문의 반을 덮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주머니는 손을 뻗어 다시 블라인드를 휙 올리며 내게 말했다.

"밖을 보면서 가야 좋지 않아요? 너무 답답하잖아~ 구경하면서 갑시다!"

힘겹게 조심조심 내린 블라인드를 순식간에 올려버린 아주머니가 얄미웠다.

마음이 상한 나는 지지 않고 아주머니를 향해 억지의 웃음을 지으며 토로했다.
"빨리빨리 지나가서 보이지도 않고, 너무 정신없어서요."

아주머니는 내 말을 듣자마자 손으로 창밖 어딘가를 가리키며 "멀리 봐요! 멀리! 가까이 앞에 있는 거만 보면 당연히 머리가 아프지."라는 말로 블라인드를 수호했다.


나는 졌다. 창쪽에 앉는다고 블라인드의 권한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화장실을 계속 왔다 갔다 할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 또한 귀찮은 일이기에... 패배를 승복하며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가만히 앉아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문득 '멀리 보면 괜찮다는 아주머니 말이 진짜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험정신이 특출난 내 눈은 금세 저 멀리 있는 밭을 바라다보았고 속이 울렁대는지, 어지럽진 않은지 몇 차례 스스로를 진단해댔다. 수초의 시간도 필요 없이 내 몸은 '속이 괜찮아요!! 아주머니 말이 맞군요!'라고 속삭였지만 아주머니의 말에 곧장 수긍하기는 민망했는지 곧바로 눈을 감아버렸다.


기차에서 내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또 다른 두통과 울렁거림,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 고통의 정확한 시작 시점은 딸아이와의 몇 마디를 주고받은 이후부터가 확실했다.

"엄마, 코로나 설문지에 내 학년 좀 똑바로 써주면 안 돼?"

"썼잖아~ 9학년!"

"아니!! 엄마 나 10학년 2학기잖아!!! 곧 11학년이구만~ 무슨 9학년이야!!!"

(대안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라 학년이 1~12학년으로 구분됨)


바로 아이가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학년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였다.

내가 논문을 쓴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밥만 제공해주던 사이 아이는 한 학년 더 성장해버린 것이다.

재차 10학년인지를 묻던 나는 "야! 너 이번 학기 성적 좀 가져와봐!"부터 "지금까지 뭘 준비한 거야?!!!!!"로 끝없는 질문공세가 이어졌고, 그때부터 집에서는 큰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볼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나기 시작했다.

-"야! 10분 공부하고 10분 쉬냐?"

-"암기를 하라고!!!"

-"너 이래서 대학 갈 수 있을 거 같아?!"

-"할 땐 해야 될 거 아니야! 내가 너한테 공부하라고 한 적 있어?? 여태 놀았으면 지금은 좀 해야 될 때잖아. 내가 대학가라고 했니? 네가 가고 싶다며!!!~ 바라기만 하면 대학에서 문 열어주고 기다리냐?"

-"결과가 대학 입학이면 지금 공부하는 과정도 감당해야 될 거 아니야!!!"


래퍼의 수준으로 쏟아내는 잔소리들.

아이도 힘들었겠지만 나 또한 영혼이 탈탈 털려 브런치에 들어올 마음의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내가 한 달이 넘어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다.

-'내 맘대로 자녀를 컨트롤할 수 없는 시기가 있음을 알았기에...'

-'모든 아이가 공부를 잘할 수는 없기에...'

-'다른 길이 있을 수도 있기에...'

이렇게 뻔하디 뻔한 말들이 내 차가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기까지... 나는 아이에게 많은 생채기를 남겨버렸다. 단지 하나의 잣대인 '공부'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린 딸아이와 끝없는 욕심으로 아이를 내몰며 죄책감에 시달린 엄마와 아빠...


어쩌면 지금까지의 고통은 열차에서 만난 아주머니 말처럼 멀리 바라다보지 못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싶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아이의 삶을 내 맘대로 재단하고 싶었기에 복장 터지는 울렁거림과 두통을 호소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수많은 육아서적에 귀감이 되는 엄마처럼 아이의 인생을 멀리 바라보며 믿고 응원하고 싶은 엄마가 되고 싶었기에 지금도 마음을 갈고 닦으며 멀리 보기를 연습하고 있다. 물론 이 마음은 시시때때로 날아오는 성적들 앞에서 무너질 것이 분명하지만 나는 나의 25살, 30살을 기억하며 넘어지고 일어서며 배워나갈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보려 한다.


결국 아이는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지금의 공부 또한 '자신을 뛰어넘는 연습'이자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을 경험'해 보는 과정일 것이다. 비록 연습과 경험의 과정에서 결과가 훌륭하지 않아도 이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아주 작은 한 과정임을 기억하면서 엄마인 나는 아이의 삶을 끝까지 응원해보려 한다.


이 글을 읽을 우리 딸!

엄마는 우리 딸이 무엇을 하건, 어디에 있건 끝없이 널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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