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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Aug 13. 2023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내가 디자인은 정말 잘하거든"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영어 문제로 근심하는 J의 한숨소리를 듣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본 적이 있었다. 

"저기.. 이미 작업은 너무 좋으니까요.. 영어공부에 조금 더 시간을 투자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돌아온 것은 J의 더 큰 한숨이 섞인 대답이었다. 

"그렇지.. 아는데.. 해도 안 되는 게 있더라고." 




중학교 체육 수업이 문득 떠올랐다. 기말고사 실기시험 주종목이 물구나무서기였다. 나를 비롯한 반 아이들은 전부 틈만 나면 교내 이곳저곳에서 짝을 이뤄 물구나무서기를 연습했다. 


어떤 아이는 첫날부터 잘해서 체육과목은 한 학기를 놀다시피 하고도 최고 점수를 받아갔다. 나는 운동을 잘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바보 같은 모습으로 줄곧 매트리스 위에 고꾸라지며 막판까지 이를 악물고 연습하여, 가까스로 부끄럽지 않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체육은 물론 전보다 더 싫어졌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일상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해야 할 일 따위는 없었다. 


없는 운동신경으로 물구나무를 서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답답함과 서투른 영어로 소통해야 하는 한국 유학생의 마음은 닮았다. 열심히 한다고 해봐야 한계가 확연한 영어 공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몸에 좋다는 맛없는 음식처럼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어지는 부질없는 시도로 느껴졌다. 아무리 먹어봐야 맛있게 느껴질 날이 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더 건강해진다는 보장도 없으니 말이다. 


특히나 미대생으로서는 더욱 그랬다. "영어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작업이 좋은 게 더 중요해. 작업이 좋으면 영어 좀 못해도 괜찮아."라는 말 한 번 안 들어본 미술 유학생이 있을까? 미대생의 전공 수업은 영어보다는 시각 언어가 핵심이다. 졸업에도 취직에도 포트폴리오가 가장 중요했기에, 자연스레 시각 언어 쪽에 비중을 더 둘 수밖에 없었다. 




시각적 언어는 말 그대로 시각적인 이미지, 영상 등으로 소통을 꾀하는 만국 공통의 언어다. 시각적 언어를 활용한 소통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대상의 범위가 넓고 직관적이라 시대를 불문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각예술이라는 것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시각적 작품성을 가진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 글로 치면 문학이다. 


예술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각적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예술인이 되어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열망이 있고, 이러한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 자신의 재능에 자부심이 있다. 


한국 미술 유학생들에게 시각 언어는 각별했다. 숨 쉬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고등 수준의 언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타국에서 초등학생 수준의 소통능력으로 대학을 다니게 되었으니, 시각적 언어만이 빼앗기지 않은 언어였고, 무기였고,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작업을 더듬거리며 장황하게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덜 괴로우려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좋은 작업물을 내보이는 것이 최선의 차선책이었다. 




J가 전공과목은 조금 내려놓고 영어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찌 보면 J는 자신의 언어적 한계를 잘 인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가성비가 영 좋지 않은 외국어 공부에 시간을 쓰는 것보다는 자신의 무기인 시각 언어를 갈고닦아 훌륭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이미 한국에 기반이 있는 사람이었고 굳이 미국에 정착해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 지혜로운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1년 정도 미국에서 일하고 나면 취업비자의 벽에서 여러 이유로 좌절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확실한 1년여의 미국 경력에 목매는 것보다는 자신만의 완벽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 유학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보다 가치 있는 성취라는 판단은 논리적이다. 


J는 자신의 실력만으로 밀어붙여 무사히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고, 졸업 후 연락은 끊겼으나 그 포트폴리오와 이력이라면 한국에서 분명 어렵지 않게 취직을 하였거나 사업을 시작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J의 전략은 J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실력에 의지하여 세워졌다.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한국 유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비슷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 실력이 채워주지 못하는 만큼을 시각적 언어를 다루는 능력, 다시 말해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 전공 과제 수행력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스스로에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가 영어는 외국어라 좀 버벅거려도, 디자인은 정말 잘하거든. 머리도 좋거든. 영어 잘하는 애들보다 내가 훨씬 뛰어나거든."이라고 주문 외듯 말해주지 않으면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기에. 그리고 그 주문에 진정성을 부여하려면 내가 정말로 잘하는 수 밖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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