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이 제주 여행의 앙꼬였어 알아?
제주도 한 달 살기 3주 차쯤이었을까. 혼자 지내는 시간이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생각 없이 썼던 돈이 점점 줄어드는 게 느껴졌고, 밥도 제때 챙겨 먹지 않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혼자 노는 것도 좋았지만, 가끔은 외로움이 밀려왔다. 예쁜 풍경을 보면서 ‘이걸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그때, 베스트프렌드인 오랜 친구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자영업을 하느라 바쁜 친구는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여러모로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쉬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지만, 가게를 비우기 어려워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남편의 배려로 며칠 쉬고 오라는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삼박사일 동안 제주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친구가 온다는 소식에 엉덩이 춤을 출 정도로 신이 났다. 성산에서부터 공항까지 차를 몰고 가는 길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었지만, 친구를 만난다는 설렘이 온몸에 퍼졌다. ‘내가 제주도에 오래 살던 사람이고, 육지에 있는 친구가 놀러 오는 것 같네.’ 별것 아닌데도 괜히 우습고 기분이 좋았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는지, 공항으로 오는 동안 카톡으로 대화하는 내내 설렘이 묻어났다. 비행기 탑승 전에도, 제주에 도착해서도, 짐을 찾아 나오는 순간까지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화면 너머로 전해졌다. 마침내 도착한 친구를 보니 우리는 둘 다 반가움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일단 웃어 재끼고 여행은 시작됐다.
우리는 원래부터 계획 없이 만나는 스타일이다. 만나서 뭘 할지, 뭘 먹을지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정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더 잘 맞았다. 즉흥적인 일정이 주는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우리의 오랜 관계를 더욱 유연하게 만들어 주었다.
사실, 우리가 자주 만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내가 고향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 친구는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다. 20대 내내 명절이 아니면 얼굴 보기도 어려웠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상에서 멀어지기도 했다. 때때로 서운한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우리 관계는 잔잔하게 흐르면서도 언제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소중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때 각자 가진 고민들이 있었다. 예전엔 고등학교 때처럼 밤마다 전화하며 고민을 이야기하고 풀면 그만이었는데, 이제는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그래서 왠지 지나고 나서야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모두가 힘들 텐데, 만나면 그냥 즐겁게 기분 전환하고 싶지 않을까?'
그래서 힘든 일이 있어도 '지금은 잘 해결됐어.' 아니면 '견뎌내는 중이야.'라고 하면서 그냥 넘기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제주라는 공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건 충분한 시간이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마주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묻어둔 이야기들이 하나씩 흘러나왔다.
굳이 어떤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 없이, 그냥 그동안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 보면 스스로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말을 들으며 '그랬구나, 얼마나 힘들었니.' 같은 말들이 오갔고, 그런 대화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순간들이었다.
어릴 땐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되던 고민들이 이제는 더 깊고 무거워졌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삶의 고민들 속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잘 이겨내고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대견한 마음도 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온 우리의 관계 속에는, 여전히 그 시절의 따뜻함과 진정성이 남아 있었다.
제주에서 함께한 시간 동안, 나는 친구를 위해 미리 맛집을 알아두었다. 정말 맛있었던 말차 크림빵도 먹고, 국밥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하루 한 끼는 꼭 국밥으로 챙겼다. 저녁에는 캔맥주를 들고 숙소 앞에서 돗자리를 펴고 마셨고, 카페에서 배불러 못 먹었던 디저트도 함께 나눠 먹었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조합인 소주와 컵라면도 빼놓을 수 없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건 성산 앞에서 해녀 할머니께서 직접 썰어 주신 해산물과 한라산 소주였다. 그날의 대화, 웃음, 그리고 함께한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저 날 감성에 취해 운 건 안 비밀이다. '결국 중요한 건 사람이구나, 내 친구구나.'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됐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와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주 앉았다. 별거 아닌 이야기들, 그리고 어릴 적 추억부터 요즘 고민까지 끝없이 쏟아졌다. 그냥 이렇게, 아무런 꾸밈없이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됐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그래, 우리는 중학교 때든, 지금이든 변하지 않고 나 그대로구나. 이렇게 우린 같이 앉아서 마주볼 때 현실이 아무리 괴롭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우리 자체라는 걸 알 수 있는 관계라니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거야 도대체..!'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우리에게는 모든 순간이, 그리고 모든 곳이 영감이었고, 가게가 문을 닫든, 날이 흐리든 그 모든 과정마저도 즐거웠다.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특별했다. 마치 중학교 1학년 첫 입학식 날, 교실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순간처럼.
그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 너 혹시 나 본 적 있지 않니?"
앞머리를 내린 단발머리 친구는 동그란 눈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가? 아닌 것 같기도,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처음부터 괜한 호감으로 시작된 우리의 우정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그때처럼, 단번에 서로를 알아봤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