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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차라니! 차와 이별한 날, 여행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제주 해안도로에서, 쾅— 그리고 폐차장까지

by 포코아

5주 차에 접어들었다. 제주 한 달 살이가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했지만, 통장 잔고를 보며 조급해하진 않았다. 퇴사 후 첫 장기 여행, 목표는 단순했다. 적절히 절약하면서도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보기. 가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자고 다짐했었다.


제주살이에 익숙해질 즈음, 계획이란 걸 아예 두지 않았다. 떠나온 이유가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는데, 막상 와보니 또 일정표를 채우며 ‘소화’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날 밤에는 다음 날 할 일을 정하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없으면 쉬었다. 새로운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았지만, 이미 맛있게 먹었던 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먹는 걸 더 좋아했다.


KakaoTalk_Photo_2025-08-10-14-01-31.jpeg 사고 당일 오후 13시경


그날은 늑장을 부리고 싶었다. 날씨는 끝내줬지만 호텔 방에서 그냥 뒹굴고 싶었다. 그러다 네이버 지도에 저장해둔 별표들을 뒤적였다. 동쪽에 머물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남쪽으로 가고 싶었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못 갔던 카페를 들렀다가 저녁까지 호기롭게 먹고 돌아오는 코스를 그려봤다. 대충 채비를 하고 서둘러 나섰다.


호텔을 나서 1km도 채 안 갔을 때였다. 로터리를 돌아 나와 40km 구간을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바람은 선선했고, 차 안에선 노래가 흘렀다. 평소처럼 브이로그 촬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음악과 바람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차가 서행을 하고 있었고, 그 앞의 차가 좌회전을 하려다 멈춘 듯했다. 순간, 내 앞차가 급정거했다.


40km 구간이었고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풍경을 한눈에 담느라 잠깐 시선이 멀어졌다.


그리고 쾅.


그 소리는 아직도 슬로모션처럼 기억난다.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역부족, 내 차는 앞범퍼까지 깊게 찌그러졌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스크린샷 2025-08-10 오후 2.06.08.png


너무 놀라서 울면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친 데 없냐는 한마디에 눈물이 더 터졌다. 울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험사에 연락했다. 곧 렉카가 와서 차를 폐차장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서 바로 폐차 결정이 났다. 손쓸 수 없었다. 차 안에 있던 옷과 짐을 모조리 꺼내 들고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상실감이라기보다, 한심함과 답답함이 먼저 밀려왔다.


친구들과 통화를 해도 대답이 잘 안 나올 만큼 멍했다. 누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 차를 이렇게 보내버린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남은 제주살이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해졌다.


사고 당일 아빠한테서 온 카톡 메시지


그래도 저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주황과 분홍, 보라빛이 뒤섞인 노을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억울할 만큼 황홀한 풍경이었다.

서행했는데, 내가 한눈을 팔았던 건가. 자꾸만 되뇌었다. 그렇다고 사고를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KakaoTalk_Photo_2025-08-10-14-04-38.jpeg


놀라운 건, 그 정도 충격에 엔진까지 망가졌는데도 내 몸은 멀쩡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엔 상실감보다 한심함이 더 컸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 이상하게도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그 차가 나를 살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깊게 남았다.


제주에서 남은 며칠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고, 친구들과 통화를 해도 멍하니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렇게 큰 사고를 내놓고 어떻게 있어, 말도 안 돼.” 계속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 와중에도 창밖의 노을은 억울할 만큼 황홀했다.


4일 뒤에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결심했다.
퇴사하고 여기 와서 나누고 정리했던 감정들 중, 필요 없는 건 몽땅 버리자.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옷이며 책상이든 손이 가는 대로 비워냈다.

그 과정에서 깨달았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건 대개 물건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것을.
내 마음 한구석에 오래 쌓여 있던 미련, 서운함, 두려움까지 함께 버렸다.

아무도 바라지 않는 사건이, 때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 된다.


그날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필요 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려놓아야 비로소 손이 비고, 손이 빌 때 비로소 새로운 걸 잡을 수 있다.
제주에서 잃은 건 차 한 대였지만(또르르..ㅜ), 얻은 건 가벼워진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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