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특별한 친구
제주도 한달살기의 3~4주 차쯤, 서쪽에서 동쪽을 거쳐 이제 남쪽 서귀포로 이동했다. 굳이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제주에 온 김에 남쪽까지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급히 전날 숙소를 예약하고 내려갔다. 내가 선택한 호텔은 오래된 시설이었지만, 워케이션 테마의 카페와 요가 프로그램이 있어 매력을 느꼈다. 이제는 밖을 돌아다니기보다는 호텔 안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여행 중반에 접어들면서 지쳤던 마음도 한몫했을 것이다. 남쪽에도 볼거리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쩐지 원없이 쉬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늦잠을 자고 하루 한 끼를 대충 해결한 후, 호텔로 돌아와 빈둥거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그런 날들이 이어지다가 미뤘던 빨래를 하러 호텔 2층의 빨래방으로 향했다.
빨래방은 세탁기 2개, 건조기 2개로 구성되어 있었고, 나는 인포메이션에서 섬유유연제를 받아 세탁기에 빨래를 넣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쇼파에 앉아 친구와 통화하며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문득 맞은편 대각선 쇼파에 앉아 있던 낯선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이 반짝거리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내 빨래가 끝난 걸 알리고 싶었던 걸까,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빨래 기다리시는 건가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맞다고 답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제주에 오게 되셨나요?”, “혼자 오셨어요?” 그녀 역시 쉼이 필요해 혼자 한달살기를 하러 왔다고 했다. 서로의 여행 경험을 나누며 어디를 갔는지, 어떤 곳이 좋았는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무작정 일상에서 달려오기만 했던 그녀는 진로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과의 경쟁에 치여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 제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나 역시 일상의 팍팍함에 지쳐 이곳에 왔기에, 우리는 서로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빨래방에서 나눈 이야기는 1시간도 넘게 이어졌고, 우리는 곧 연락처를 교환하며 다음 날을 기약했다. 다음 날, 호텔의 요가 프로그램에서 다시 만났다. 같은 프로그램에 등록한 걸 알고는 웃음이 나왔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언니 동생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제주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 그녀와 함께 책방을 구경하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비 오는 날에는 치맥을 즐기며 소소한 행복을 공유했다.
귤을 사면 양이 너무 많아 반씩 나눠 먹었던 일도 있다. 사소하지만 따뜻했던 순간들이었다.
그녀와의 대화는 단순한 여행 이야기를 넘어, 서로의 삶과 고민을 나누는 깊은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녀도, 나도 각자 힘든 시간을 겪으며 제주에 왔다. 그런 경험이 우리를 연결해 주었던 것 같다.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지금의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곤 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을 스스로 가지게 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서로를 격려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했다. 평소에는 꺼내기 어려웠던 이야기들도 제주라는 낯선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며, 앞으로의 삶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종종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카페에서 몇 시간씩 대화하며 웃고 떠드는 시간이 늘 기다려진다. 제주도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내게 소중한 친구가 되었고, 그 인연은 지금도 나에게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제주 한달살기는 나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그녀와의 '우정'은 가장 특별한 선물이다.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든, 그 시간들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서 반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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