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히 계획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좋았다. 서귀포의 아늑한 숙소에서 하루를 시작하며 생각했다. 오늘은 내 자신을 위해 시간을 보내자. 그런데 3주차가 넘어가고 4주차에 접어들었는데도 감기 기운이 떨어지지 않는 게 문제였다. 감기를 달고 살려고 제주에 온 건 아니었는데, 도대체 언제쯤 회복될까? 이럴 땐 몸보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우선 목에 기름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다 보니 삼겹살이 떠올랐다. 혼자 삼겹살? 먹어본 적은 없지만, 한 번쯤 도전해 보고 싶었다. 마침 미리 찾아둔 혼밥하기 좋은 삼겹살 맛집이 떠올랐다. 언제 갈까 벼르고 있다가 오늘이야!라는 결심으로 길을 나섰다. (참고로 여긴 정말 강추! 라면도 끝내준다.)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알바생이 물었다. “몇 분이세요?” 나는 약간 부끄럽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혼자에요!” 처음 혼자 삼겹살집에 들어와 이렇게 당당히 말하니 기분이 묘했다. 항정살과 삼겹살 세트 메뉴를 주문했고, 사람이 적어서인지 알바생이 직접 고기를 구워주셨다. 언제 고기가 익는지 잘 모르는 나에겐 이보다 완벽할 수 없었다.
제주에서 생긴 나만의 습관이 하나 있다. 카페나 식당에서 사장님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스몰토크다. 혼자 식사를 하다 보면 사장님이 먼저 말을 걸어주시는 경우가 많았고, 그 덕분에 점점 용기가 생겼다. 오늘도 “혼자 먹으러 온 게 처음이에요. 고기 맛있게 구워주셔서 감사해요!”라고 먼저 말을 건넸다.
그때 묵묵히 고기를 굽던 알바생이 고개를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거 다 익으면 항정살부터 소금에 찍어서 드시고요. 그다음에 파절이와 함께 드시면 됩니다.” 그러고는 다시 고기에 집중하며 하나하나 완벽하게 구워줬다. 적당한 무관심이 아닌, 프로다운 담백함으로 대해주는 그 태도에 오히려 더 감사했다.
맛있게 구워진 고기를 한 점 집어 소금에 콕 찍어 먹었다. 항정살은 서걱서걱 씹히면서도 쫄깃쫄깃해 정말 맛있었다. 이어 상추에 고기를 올리고 마늘과 쌈장을 더해 한입 가득 먹었을 땐, 정말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목의 통증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평소엔 밥 한 공기를 제대로 다 먹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날따라 입이 터졌다. 술 한 잔이 생각나긴 했지만 목이 부어 콜라 한 잔조차 자제하며 고기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갑자기 옆 테이블에서 라면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너무 맛있어 보여서 '남기더라도 다 먹자!'라는 마음으로 라면을 하나 시켰다.
진심 너무 꼬들꼬들하고 짭짤한 게 완전 내 취향이었다. 사실, 파스타는 종종 만들어도 라면은 잘 못 끓여서 거의 먹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라면은 나에겐 특식이나 마찬가지다. 후루룩 후루룩 먹다 보니 어느새 라면까지 완벽히 클리어했다. 위가 찢어질 듯이 아플 만큼 배부른데, 왜 이렇게 잘 먹었을까? 아마도 음식에 온전히 집중하고, 그 순간을 즐긴 덕분이 아닐까 싶었다.
평소엔 밥 한 공기를 다 먹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이날만큼은 눈앞에 놓인 고기가 다 내 것 같았다. 혼자서 고기를 굽고, 한 점 한 점 천천히 음미하며 먹다 보니 이렇게 잘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온전히 음식에만 집중했던 순간이 언제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밥을 먹을 땐 왠만하면 조용히, 아무것도 보지 않고 음식에만 집중하려는 습관이 생겼다. 한 끼 한 끼를 소중히 대하고, 나를 위한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새로운 방식이랄까. 이 작은 변화가 나를 더 잘 돌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날의 한 끼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었고, 온전히 나를 위한 집중이었다. 눈앞에 놓인 고기 한 점, 라면 한 젓가락에 집중하며 느꼈던 그 평온함은 꽤 오래 마음에 남았다.
혼자라는 이유로 주저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었던 순간들을 스스로 특별하게 만든다는 것. 그런 시간들이 쌓여, 어느새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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