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진 울음과 채워진 침묵
<진공관>
갓난아기 때인가 몇 날 며칠을
컴컴한 동굴에서 숨어
난리통을 견디는 눈빛, 눈물
거둔 빛이라고는 그게 다여서
어두운 게 싫어
결코 이길 수 없어도
마냥 지기 싫어 십오 촉 전구 하나 방안 가득 켜두고
사는 게
거진 살아지는 거야 하고는
이것 봐 이백 원짜리 전구 하나가
이 가난한 방을 채우네
눈물 한 방울 더하면 눈이 부셔
밤마다 방공호에서 못 울던 울음 이제야 울더니
그 울음에 잠 못 자던 어린것이 꾸벅 졸면
자네? 하고 불을 켜둔다.
아가... 빛을 가리면 그늘 진다.
그늘지면 어둠 되고 어둠이 침묵되면
죽은 거 매 한 가지여 불 켜... 하고는
하루 종일 TV를 켜두고
잠을 자도 TV는 켜있고
고무신에 주전자 껴안고 엄마 옆에 엉덩이 붙이고 흙내음, 뿌리냄새 죽은 것 먹고살아 꿈틀거리는 땅속 것들의 무심하고 부지런한 욕심의 냄새 인민군인지 국군인지 이름표 없는 포탄에 방공호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 사이로 삐져나온 이웃누이 작은 손이 울음도 없이 바르르 떠는데 그걸 보며 울음도 없이 우르르 도망치듯 떠나는데
그게 지워질 리가 있나...
캄캄하면 다시 돌아간 그 자리
필리멘트처럼 불씨는 곳곳에 날리고
귀먹은 울음은 바르르 몸만 떠는 밤
다시 전구를 켜고
TV를 켜두고
“... 네타냐후 총리는 전쟁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며... 오늘 가자지구 병원 주차장 난민 텐트촌에선 산채로 침대에서 불타 죽은 알 달루라는 열아홉 살 청년은 의사가 꿈이었지만... 오늘 대통령은 북한을 언제든 선제타격할 것이며 핵 억지력을... “
이 시끄러운 밤. 여전히 소리는 진공
어둠은 이기고
기억은 증폭되는 진공관의 희미한 전구
라디오에선 항복 휴전 종전 새마을 온갖 말들이
다툼하며 전구를 껐다 켜는데
“가라앙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다아알밤~“
좀처럼 깨지 않고 잠든
아이는
이제야 이웃 누이의 바르르 떠는 손을 꼭 잡고는
울음을 터트린다.
하늘을 줄지어 올라가는 작은
전구들의
소리 없는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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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근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글쓰기 근육엔 인간의 두 종류의 근육 중에 적색근이 필요하다. 지구력을 담당하는 적색근과 순발력을 담당하는 백색근 중에서 글은 순간의 힘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노동의 근육이어야 한다.
진공관은 붉게 빛나며 소리를 들리는 만큼 커지게 한다. 나중엔 트랜지스터와 반도체에 자리를 내주지만 세상의 무수한 작은 것을 내 것으로 증폭시켜 주는
진공관의 원리는 그대로다. 내 귀에 전파 신호가 들리진 않으니까. 진공의 원리는 소리를 없애고(진공에선 소리가 안 들린다.) 소리를 찾고 키웠다.
전쟁을 흔하게 말한다. 노동으로 적색근으로는 보금자리 집 한 채 구하기가 불가능한 시대에, 차라리 전쟁이 나면 좋겠다는 말들을 한다. 아니... 그냥 사는 게 전쟁이다. 같이 사는 게 없으니 네가 살거나 내가 살거나 생존자는 하나뿐, 아니 결국 둘 다 아니다.
전쟁을 겪은 부모님 세대는 진공관 라디오가 들려주는 휴전 소식을 공기처럼 들었을 것이다. 차마 기억 밖으로 나오지 않던 비참한 참상은 그 진공관 속에 갇혀서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다.
하지만 어둠을 싫어하고 침묵을 두려워하는 80넘은 아이들은 TV를 켜고 잠을 청한다. 잠을 청하는 아이들은 다시 공습과 어둠과 시끄러운 침묵의 악몽에 빠진다. 깨어보니... 꿈이 아니다. 이 숨 막히는 진공의 세상 진공관의 소리가 들리는가?
적어도... 최소한... 당신의 울음 소리는 들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