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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Oct 24. 2024

일희일비

희극도 비극도 아닌 삶.

<물리학적 피에로>


웃을 때마다

젖은 마음이 마르진 않는다

낮이 왔다고 밤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뺏고 빼앗기는 마음의 영토에 그어진

죽음의 국경은 침략당한다


살려면 죽고, 죽으려면 살아라 뒤엉킨 격언 사이로

웃음과 눈물이 하나의 표정을 두고 치열한 백병전

입술은 웃고

눈가는 젖고

가슴을 뜯으며

엉덩이 흔드는

피에로


이 거대한 연극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르면서

이 거대한 무대의 막을 올리고 내린다

끝나지도 않는

관객 없는 시끄러운 방백들


사느냐 죽느냐...


암전! 암전! 어둠 속 방백과 복선

무대 위로 좀비들 걸어간다

경악하는 효과음 신음소리

           

아, 사느냐... 죽느냐...


양자역학적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양자 너는 어쩌다가 이 무대까지 끌려왔니?

언니라고 부를까? 아니면 오빠? 넌 죽었니 살았니? 둘 다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으니

이 무대가 연극인지 실제인지 모르고

저 피에로가 진짜일까? 가짜일까?


막이 오르면 객석에 앉은 피에로.

울 때마다 박수를 받고

웃을 때마다 박수를 받고

죽을 때마다 박수를 받고

살아날 때마다 박수를 받는다.


객석 가득 피에로는 카드섹션으로 내 표정을 그린다

죽었지만 산 살았지만 죽은 표정

울면서 웃고 있는

이 거대한 연극을 향한

응원


박수는 멈추지 않으니까.

(2024. 11. 12 - 재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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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쁨과 슬픔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는 전자현미경을 천체망원경으로 바꾸기도 한다.


일희일비하지 말자며 삶을 관조하기엔 세상은 이미 거대한 연극무대다. 이 거대한 연극무대에서 각자 맡은 역할은 때론 겹치고 때론 대립된다. 네가 살아있다면 나는 살아있을 수 없어. 이렇게 외치는 입장과 가치들이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결론은 없다. 누굴 살린단 말인가? 무대를 향해 배우가 극 중 주인공의 심리를 풀어내는 방백 같은 말과 글과 이야기들이 공기처럼 가득 찬 시대다. 그 방백들은 함부로 슬퍼하지 말라. 혹은 기뻐하지 말라. 혹은 죽지 말라. 혹은 살지 말라 무분별한 격언을 격자무늬 카드섹션처럼 일사불란하게 뱉어낸다.


  아마 오늘도 무수한 비극이 탄생했고, 무수한 희극이 사망했다. 그래서 나는 이 거대한 무대와 시간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계속 미워한다. 그러다 왜 미워하는지 망각하고 그러다가 또 미워한다. 피에로들은 아니 사람들은 사랑한다. 그러다가 망각하고 미워하고 또 사랑한다.


  양자역학과 퀀텀이 펼쳐낸 생각에서 질문한다면... 우리가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길,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않길 묻는다. 모든 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므로 우리는 무엇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건 거대한 희극과 비극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to be or not to be?


  삶과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비현실, 무대와 무대 밖, 연극과 실제의 문제로 바라본다면 구분하지 않거나 구분할 수 없음의 접속사에 모든 중력이 작용하는 상황이 될 것 같다.


 그 상태나 관계를 '삶'이라고 불러야 적당할 것 같다.

 그래야 비로소 탄생과 죽음의 양 끝 사이를 출렁이고 있는 이 관계와 시간들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이제 다시 오랜 서랍을 열어 개구리반찬을 먹는 여우에게 묻는다. '죽었니 살았니?'

 답은 모른다. 하지만 내 다리는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


세상이라는 연극 무대 아래 객석에 앉은 나를 구해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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