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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Aug 10. 2024

Essay <Ni volas interparoli>

[Sound of Life] 우리는 대화하기를 원한다.

[Y스토리] Ni volas interparoli. 우리는 대화하기를 원한다.

2022-12-06 발행.


0. 생명의 시작과 끝과 듣기.


 듣는다는 것은 인간 소통의 시작과 끝이다. 심장이 뛰고 처음으로 갖게 되는 것은 청각, 그리고 마지막 심장 박동 이후에도 청각은 남아있다. 그래서 태교도 임종 인사도 모두 귓가에 들려준다. 들으면서 태어나고 들으면서 죽는 인간의 소통. 결국 듣기라는 건 생명의 신비가 알려주는 소통의 본질이다. 입은 하나고, 귀는 두 개인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듣고 있을까? 제대로 소통할 수 있을까? 듣기는 퇴화당하고 말하기만 강요당하는 시끄러운 적막 속에 신생아의 울음도, 임종하는 노인의 미소도 사라졌다. 슬픈 난청의 시대.


1. 귀 꺼풀과 이중시간의 창출


 듣기는 소통의 본질이지만 유연하고 부드럽다. 택시를 운전하며, 자전거를 타며,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며 가볍게 경청(輕聽)할 수도 있고, 고요함 속에서 불경이나 찬송, 혹은 첨예한 아침 시사 프로그램의 발언을 귀 기울여 경청(傾聽)할 수도 있다. 둘 다 할 수도 있다.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리면서도 때때로 필요한 소리는 집중하고 저장한다는 것. 아마도 ‘눈꺼풀은 있어도 귀 꺼풀은 없다.’는 광고계의 표현처럼 귀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항상 열려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선택과 집중의 능력 아닐까?


 그래서 라디오 PD들은 항상 소리를 듣는 사람, 청취자의 상황을 생각한다.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도 노동과 다른 활동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의 ‘이중시간의 창출’에 맞춰 적정한 스토리의 강약을, 리듬을 머릿속으로 그려 전달해야 한다. 시청자를 집중해서 마주 보게 하는 미디어가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향을 따라 함께 동행하는 미디어인 라디오. 그래서 청취자들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잘 들려주기 위해선 그들의 마음을 잘 들어야 한다.


2. Heardability와 듣기 평가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승패의 이분법으로만 치열하게 갈려있다. 이런 세상에서 듣기란 너무 어려운 일.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세워놓고 승패를 가늠해보라 한다면, 사람들은 쉽게 듣는 자를 패자로 꼽는다. 패자가 되기 싫어서 듣기도 전에 들리지도 않을 말들을 거칠게 던진다. 유튜브엔 귀가 먹을 정도로 볼륨을 높인 혐오와 차별의 말들이 가득하다. 그 조각난 날카로운 말의 투석전이 뉴스를 채운다. 분노와 공격의 말들 사이에서 듣는 능력은 압사당한다.


 소통은 권력관계와 밀접하다. 최고 권력자의 말을 놓고 전 국민 듣기 평가라는 웃지 못할 논란을 만들어낸 건 역설적으로 그 권력자의 듣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전 국민에게 드러낸 촌극이었다. 지금도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은 절규한다. 제발 우리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고... 진심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소통은 완성될 때가 많다.


 한 언론학자가 말한 Heardability(들을 가능성, 듣는 능력)라는 개념처럼 듣는 능력, 들을 가능성이 낮은 사회는 민주주의가 망가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권력자를 선별하고 평가할 때 그가 듣는지 들을 능력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3. Ni Volas Interparoli(우리는 대화하기를 원한다). 지구인들이여.


 다시 이 두서없는 글의 제목으로 돌아가자. 폴란드의 안과의사 자멘호프가 만든 세계 공용어 에스페란토어는 시대를 앞서가는 아티스트 윤상의 곡 제목이기도 하다. Ni volas Interparoli. 우리는 대화하기를 원한다. 이 곡은 인간이 자신을 가둔 언어를 넘어 타인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바벨탑을 쌓은 인간의 욕망에 신이 내린 벌을 이기려 우린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오랜 노력은 두 글자로 ‘대화’. 이 대화는 말하기와 말하기가 아니다. 듣기와 말하기의 순환이다. 그 끝에 다다를 이해와 공감의 마음이다. 좀 더 목소리와 권력이 큰 사람이 기꺼이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듣는 사람은 대화하기를 원하는 소통하는 인간이다. 듣지 않는 사람은 대화의 반대편, 싸움과 폭력을 향한다.


 이제 귀를 열어보자. 어떤 소리가 들릴까? 화성탐사선이 들려준 지구 밖의 쓸쓸하고 고요한 소음과는 달리 유일하게 시끄럽고 분주한 소리를 가진 별 지구가 들린다. 그 안에 귀를 가진 들을 수 있는 다양한 인간들도 있다. 우리는 (다행히도) 들을 수 있다.


 아이들 재잘거림에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하는 어르신들. 솔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에 답답함이 씻기고, 밉고 싫은 사람의 말을 일부러 들어주었을 때 가슴속 호수가 반짝인다. 더 잘 들을 수 있게 된 귀는 비로소 사랑하는 것들의 숨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게 된다. 아직 모르지만 그 순간을 행복이나,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대화하기를 원한다. 들을 수 있다면 반드시 이해할 수 있고... 끝끝내 다시, 서로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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