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틈 Aug 27. 2024

나는 노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죽은 자와 산자를 연결하는 기억의 DNA, 노래. 

죽음을 너머 전해질 수 있는 말, 노래 


'사는 동안은 빛나시길. 결코 슬퍼하지 말고. 

 삶은 잠깐이고 시간엔 대가가 있을 뿐.'

 (세이킬로스의 비문 가사, 노랫말)

While you live, shine have no grief at all

life exists only for a short while and Time demands his due.

(인류 최초로 기록된 온전한 그리스의 노래 악보, Seikilos Epitaph,  소장 : 덴마크 국립박물관)

  지구상 최초의 노래는 뭐였을까? 아마 생명이 생기기도 이전의 거대한 중력과 질량이 빚어내는 충돌의 소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노래한 최초의 노래는 뭐였을까? 원시인이 들려오는 동물이나 자연의 소리를 흉내 내는 것. 먼저 귀로 들리는 소리들을 다시 내 입으로 내어주는 것. 노래는 귀에서 시작되었다. 


  4만 년 전의 뼈피리뿐 아니라. 대부분 최초의 악기로 추정되는 '타악기'는 돌과 나무, 북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그 연주소리는 상상에만 머문다. 


 하지만 덴마크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세이킬로스의 노래'는 음계와 가사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노래로 현재까지 알려져 있다. 1세기 경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이 노래는 유튜브를 통해 다양한 현대인들의 버전(?)으로 들을 수 있다. 


   유한한 삶에서 빛나고 행복한 삶이길 빌어주며 죽음의 단서를 붙인 이 노래를 재현한 곡조와 가사를 듣고 곱씹으면 낯선 노래가 아니라 언젠가 고대의 들판에서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들려주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말이 노래가 된 이유가 뭘까? 말보다 노래가 더 오래 죽음을 너머 오래 전해지기 때문 아닐까?


 일부러 기억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이야기, 노래 


  인간이 인간인 것은 노래하고 사랑하기 때문. 그렇게 믿는다. 노래의 힘은 신비롭다. 인간의 기억력은 짧아서 심리학에서 유명한 Magic No.7처럼(전화번호가 7개였던 이유!) 7개 이상의 숫자만 넘어가도 기억이 가물해지는 인간의 평범한 능력만큼이나 우린 긴 이야기를 담아둘 능력 혹은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하지만 노래는 우리의 의지나 능력과 무관하게 시간과 수명을 건너뛰며 존재한다. 교가나 군가, 어릴 적 동요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기억된다. 무심결에 들렸을 광고 CM송은 선명하게 가사와 음정을 기억한다.  호스피스 병동의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속에도 의식이 희미하고 소통이 어려운 임종 앞의 환자들이 노래만큼은 기억하고 따라 부르고 있다. 


  노래는 기억의 DNA와 같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고리는 DNA. 노래 속엔 기억과 감성의 DNA가 분명히 있다. 아마도 인류학적인 분석으로도 밝혀낼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지역에 따라 선호하는 음색과 음계가 다르고 리듬도 다르다. 살아가는 환경과 조건, 풍속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DNA처럼 이어지는 거대한 정서의 흐름도 영향을 미친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북쪽 아리랑'과 묵묵히 평야와 바다를 오가는 '서남쪽 아리랑'


   말은 지역에 따라 사투리를 갖는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 어디에서든 지역에 따라 말투와 억양, 음정이 다르다. 말도 노래라고 한다면 서로 다른 노래의 특색을 갖고 있는 것. 노래, 특히 삶과 닿아있는 민요에서도 그 사투리가 있다. 국악에서는 '토리'라고 부르는 이 지역적 특색은 각 지역의 깊은 문화와 정서가 되어 도도히 흐르고 묵묵히 쌓여간다. 


  육자배기 토리, 비옥한 만큼 혹독한 노동과 삶이 뒤따르던 서남쪽 전라도 지역의 음악들은 느리면서도 힘이 있는 황소의 모습이 있다. 인내하지만 기어이 이뤄내고 마는 한 해 농사처럼 눅진한 선율은 아래로 힘 있게 땅과 논과 밭을 누르고 파내는 선율의 흐름이 있다. 진도 아리랑을 불러보라. 푹푹 빠지는 논에서 가을 풍년을 꿈꾸는 거친 농민의 땀이 음계로 보일 것이다. 


 동쪽으로 조금 위로 가보자. 


  메나리 토리, 척박한 산지와 높은 절벽 깊은 계곡이 흐르는 경상북도와 강원도의 음악들은 높게 높게 산을 오르는 경쾌한 소리가 있다. 밀양아리랑의 선율을 입에 담으면 보인다. 치고 오르고 높게 부르고 메아리치는 이 노래는 그 환경과도 닮았지만 기어이 끝끝내 이겨내고 인내하는 투쟁적 정서도 깊다. 광복군 아리랑의 선율이 밀양아리랑인 이유도 같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평창 올림픽에서 들려온 '정선아라리'처럼 첩첩산중의 기다림 끝에 산자락을 흐르듯 내려가는 풍경과 마음을 표현한 노래는 '흐르다'라는 의미가 느껴진다. 무려 900수가 넘는 가사가 쌓이고 이어질 만큼 '기다림'이라는 정서가 산등성이를 따라 계곡으로 흐르는 삶의 풍경이 노래로 담긴다.  


  아마 어느 전쟁터에선 진군가로 밀양아리랑을 축제와 위로의 노래로 진도아리랑이나 육자배기를 불렀을 것이다. 산과 들과 생존을 닮은 노래들은 쌓이고 이어지며 문화가 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강원도 영월 - 청령포, 단종의 슬픈 이야기와 3면이 절벽이고 계곡이 거센 풍경은 '아라리'같다.)


dubito, ergo cogito, ergo sum


  데카르트라는 이름을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교과서에도 등장하게 한 저 유명한 명제. 프랑스어로 처음 알려지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알려져 있지만 라틴어로 저 철학자의 의도를 더 정교하게 담은 표현은 두 비토, 에르고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라고 한다. 조금 딱딱해 보이는 철학 이야기에서 노래로 넘어와 본다면. 의심과 생각으로 존재를 자각하고, 의식을 살펴보는 철학만큼이나. 노래도 존재와 의식을 확인하고 규정할 수 있는 힘이 충분하다. 


  노래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청각장애인조차도 노래의 느낌과 마음은 있다. 그들을 위한 진동과 시각형태의 음악 서비스도 있다. 인간은 모두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기억한다. 노래는 곧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험한 노동에서 특히 저 강원도 빽빽한 낙락장송을 베어 쓰러트리고 강물에 띄워 서울까지 옮기는 삼판의 일꾼들이 부르는 노동요는 노동 그 자체의 모습과도 닮았고(목도소리) 그 안에 메겨진 (개인이 돌아가며 부르는 가사, 그리고 후렴구가 이어진다) 가사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들이 죽지 않고 기억되어 사람들에게 혹은 DNA를 공유한 후손에게 전해진다. 공사장의 연장 정도로 소모되다 사라질 것 같은 이들도 노래 덕분에 존재한다. 


  나는 노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마음을 설명하기란 어렵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 어렵다. 나의 마음 말고 너의 마음은 더 어렵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말로 설명할 때 오히려 마음이 다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노래로 한다. 비가 오는 날, 오래된 그리움이 새롭게 싹을 틔운 날, 침묵 속에서 먼지가 서로를 껴안는 소리가 슬픈 날... 노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해 준다. 존재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분명히 있지만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여기에 존재한다고 알려준다. 나는 지금 노래한다. 


2024년 8월 27일(화) 오전에 처음 씀.



이전 12화 지구라는 거대한 라디오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