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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창훈 Dec 17. 2022

독작, 늦은 점심의 만찬

이 별에서 쓴 일상과 그리움의 시

독작, 늦은 점심의 만찬  



1.
몸이 붕 들린 것만 같다
허공에

거대한 느티나무는 빈 가지를 부르르 떤다



2.
한 자리에 서서 나무는
한 번도 가지 못한 길을 꿈꾸는 건 아닌가

작은 새 한 마리 앉았다
다시 날아가는 하늘

그리움은 뿌리에 있고
열망은 날개에 있다


3.
떨리는, 부르르 떨리는 이 몸은
그럼 나무인가.

몸에 살이 껴서
들리는 어떤 예감들

기운을 느낀다는 건
아픈 일이다

감기

지독하다



4.
지독한 허기를 느낀다
허름하게 먼지를 날리는
해장국집

설렁탕에
데킬라 한 병

먼지의 표정으로
지루하게 하품하던 아줌마가
동그랗게 뜬다
눈을



5.
눈아 내려라
내렸으면 좋겠다 라고 순간 생각한다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멀건 국물
두툼히 짤린 고기
뜨거운 데킬라가
속을 토닥토닥 달랜다

뭐라 하든 누가 보든
우아하게 시집을 보며
먹는 이 늦은 점심의 만찬.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6.
백석의 겨울시를 보다
창 밖 너머를 본다

눈이 온다 거짓말처럼
소리없이 펑펑 내리고 있다



7.
환상이라고 뭐라
환각이라고...

더 이상
소비없는 행복이란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이 쓸쓸한 세상에서

환상이면 어떻고 환각이면 어떠리

내가 네가 우리가
오랜만에
내 안에 네 안에 우리 안에
조용히 머무를 수 있는 시간

그게 폭설의 시간 아닌가.



8.
세상의 모든 구석구석

눈은 펑펑
푹푹 내리고 있다



9.
조금 후면 길을 나서야지

더 멀리 가보려 발버둥칠 필요 없이
더 빨리 닿으려고 마음 졸이지도 말고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며

느린 산책자가 되어야지

눈사람 하나
내 안에 만들어야지



10.
졸고 있다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고단한 밥 한 끼
따스히 대접받았습니다

지갑을 꺼내 지불해야지
이것은 소비가 아니다.



11.
여닫이 문을 연다
눈처럼 눈부시게 들어오는
햇살

내가 녹는다는 이 데쟈부.

아 따스해서 좋다. 



--- 오래 전 겨울. 설렁탕집에서의 독작을 기억하며...






2015년 겨울에 블로그에 올려두었던 시(?)입니다.

무작정 전철을 타고 경기도의 외곽으로 나가

허름한 식당에서 낮술을 먹었었던 선명한 기억.

'데킬라'라고 썼지만, 실은 참이슬 빨간병이었습니다.ㅎㅎ


그날... 함박눈이 정말 무장무장 소리없이 퍼붓고 있었습니다.

공책을 꺼내 이 글을 썼었지요.


때마침 폭설로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인

지금 여기에 

잘 갈무리해 두어도 좋겠다 싶어 올립니다.


브런치 작가님, 이웃님들의 안녕과 평온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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